덴마크 라이프 2# 회사생활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덴마크의 한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를 했었다. 내가 있던 곳은 60명 정도가 일하고 있는 코펜하겐 지부였고, 덴마크 제2도시 오르후스(Aarhus)와 노르웨이 오슬로에도 지부가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의 근무환경, 복지, 인간관계, 일하는 과정과 여가를 누리는 방식 등에 대해 두루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덴마크의 회사 문화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 복지
북유럽은 오랜 시간 복지제도를 다듬어 온 나라답게 회사에서도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았다. 우선 근속 1년부터는 5주의 유급휴가 기간(직급에 따라 3-5주 혹은 개인의 계약서 내용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이 주어진다는 점이 인상 깊었는데, 연차라던가 이것저것 쓸 수 있는 휴일을 모으면 7~8주까지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8월부터 근무를 한 나는 회사의 절반이 비어있는 상태로 인턴생활을 시작했고 매주 차례차례 사람들이 돌아왔으며 까맣게 그을린 그들의 스페인 한 달 여행기라던가 가족과 노르웨이 산골에서 보낸 여름방학 이야기 등을 들으며 한동안 재미있는 점심시간을 보냈다.
1년의 유급 출산휴가도(부부가 각자 1년씩 쓸 수 있다. 도합 2년을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 올인할 수 있는 것이다)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앞날 창창하던 지인들이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보았고, 출산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본인의 커리어와 상관없이 몸값을 낮춰서 재계약을 하는 경우도 보았기에 이런 제도들이 더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선 보통 출산 전후로 1년을 엄마가 먼저 쓰고 그다음에는 아빠가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평일 대낮에 공원에 가면 유독 1-2살 난 어린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수다를 떨고 있는 아빠들을 많이 볼 수 있는가 보다. 출산휴가를 떠날 혹은 떠났다가 복직한 동료에 대해 암암리에 존재하는 차별 같은 것도 없다. 언젠간 내가 사용하게 될 혜택이기에 품앗이를 하는 마음으로 그 빈자리를 기꺼이 메우는 것이다.
2. 교육제도
이 또한 복지제도의 일종인데, 회사 내에는 여러 가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이 많았다. 우선 기본적으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나 최근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20분남짓의 런치 렉쳐를 준비한다. 또 주기적으로 사내 세미나나 외부인을 초대해서 진행하는 강연도 열려 인턴으로 있던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또 여성 디자이너 교육기금이라는 명목으로 회사에서 한 사람에게 2-300만 원 정도의 돈을 지급해 주는데(일회성인지 매년 받을 수 있는지는 알아보지 못함. 협회에서 보조가 된다고 한다), 원하는 대로 쓰고 디자인을 배우는 데에 사용했다는 증빙만 후에 첨부하면 된다. 이 돈으로 여직원들은 해외로 디자인 여행을 다녀오는데 쓰기도 하고, 취미 삼아 도예 디자인을 공부하는 데에 사용하기도 하며, 프로그램을 배우는 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에서 동종업계에 있는 친구가 배우는 것 없이 소모만 되는 것 같아 6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런 제도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회사를 다니면서도 고갈되는 느낌 없이 내 역량을 끊임없이 키워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3. 근무시간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우리나라의 평일 저녁 풍경이 변화 중이라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본다. 그걸 보면서 잠시 작년의 회사를 떠올려봤다. 덴마크의 법정 근로시간은 주 37시간이다(이것만으로도 충격이었는데 네덜란드는 무려 32시간이라고 한다). 보통 아침 아홉 시에 나와 다섯 시에 퇴근하는데 점심시간 포함 하루에 8시간으로 계산하다 보면 금요일에는 당연히 시간이 남는다. 인턴생활 첫째 주 금요일, 사람들이 11시부터 '주말 잘 보내~'라며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더니 세시가 되자 90%의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평일에 조금 일찍 나와 더 일하고 금요일에는 아예 안 나오는 사람도 많다). 나중에는 적응이 돼서 목요일 오후부터 어디로 놀러 갈지 계획을 세우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만일 주중 37시간 이상을 일했을 경우 월차 일수와 상관없이 초과근무를 한 만큼 휴일로 적립해서 쓸 수 있는데, 이는 눈치 볼 필요 없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다. 관대한 휴가와 관대한 휴무일! 이쯤 되면 이렇게 짧은 시간을 일하고도 회사가 돌아가나 싶을 수도 있겠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물론 시기별로 또는 회사별로 다 다르겠지만, 나는 야근과 철야를 밥먹듯이 하기로 알려진 건축분야에 몸담고 있다. 똑같은 인턴인데도 한국의 회사에서 일할 때, 심할 경우 새벽 4,5시에 퇴근하고 다음날 아홉 시까지 다시 출근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20대 중반의 체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빠지고 스트레스로 몸이 자주 아팠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종합병원처럼 약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덴마크에 와서 매일 오후 4,5시 퇴근에 부득이하게 야근을 했을 경우 야근한 날 만큼 쉴 수 있게 되니 일을 하면서도 스트레스가 많이 없었다. 잘 쉬어야 능률도 오르도 오르는 법이라고, 그렇게 쉬고 돌아온 후 사람들은 더 집중해서 일에 매진했다.
4. 회사 분위기, 업무 집중도
상대적으로 짧은 근무시간을 자랑하는 덴마크에서 단시간 내에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해선 당연 업무 집중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는 미국 회사에서도 마찬가진데, 직원들이 전반적으로 업무시간에 딴짓을 잘 안 하는 편이다. 정부에서 최근에는 근무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연봉을 삭감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나오고 있다. 잠깐의 농땡이 시간조차도 허락할 수 없다는 건가. 물론 사람에 따라 직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집중해서 끝내자는 분위기이고, 나도 주어진 것들을 빠르게 끝내기 위해 핸드폰 한 번 들여다보지 못하고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해진 업무시간에 일을 정확하게 끝내고 일찍 퇴근 도장을 찍는 게, 인터넷 검색도 좀 하고 스마트 폰으로 쇼핑도 하고 커피 마시러 바람도 쐬다가 늦게 퇴근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에는 나 또한 동의하기 때문이다. 업무일지를 쓸 때 프로젝트 별로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매일 상세하게 적고, 프로젝트 매니저와 매니저 겸 회계관리자가 최종적으로 체크하며 새어나가는 인력이 없는지 세심하게 살핀다. 일을 한 시간과 투입되는 인력을 계산해서 고객에게 비용을 청구하기 때문에 이 과정은 굉장히 중요하다.
회사 분위기는 자유로운 편이었고, 직급에 따른 결정권은 있되 권위의식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20년 정도의 직급 차이가 나는 사람도 중요 회의시간을 제외하고는 친구처럼 대화했고, 서로 존중하는 풍토가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사장도 자신의 밥은 줄 서서 제 손으로 떠먹고(어떤 때에는 아무도 점심을 먹으라고 챙기지 않아 다이닝룸에 늦게 도착해 먹을 게 없어 야채만 간신히 덜어먹는 모습도 보았다), 프린터를 잘못 출력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으며, 입은 가능한 적게 열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4. 권익보호
덴마크는 철밥통 직업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좋게 말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높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고용주가 고용인을 손쉽게 해고할 수 있다. 아니, 복지의 나라라더니 당최 이게 무슨 얘기 일까? 대신 정부에서 약 2년 동안 월급의 90퍼센트를 실업수당으로 지원해준다고 한다. 쉽게 자를 수 있는 제도 뒤편에 에어백을 두어 직업을 잃더라도 사회 밖으로는 밀려나지 않도록 안전지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수당은 끊임없이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야만 받을 수 있다는 귀찮은 점이 있긴 하지만, 당장 잘리더라도 다음 달의 카드값과 집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밖에도 여러 유니언과 협회들이 결성되어 있어 끊임없이 각 집단들의 이익을 위해 토론하고 건의하며 제도를 강화해 가고 있다.
5. 점심시간
내가 있던 곳의 점심시간은 삼십 분에서 사십 분으로 다소 짧은 편이었다. 단, 시간이 짧더라도 걱정할 이유는 없다. 회사의 다이닝룸으로 매일 11시 반 케이터링 서비스가 배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이 서비스를 선택하면 한 달에 십만 원을 조금 웃도는(750 크로네) 비용이 월급에서 차감되는데, 덴마크의 물가 대비 훨씬 저렴하게 한 달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셈이기에 모두가 이 서비스를 이용한다. 또한 남는 음식들은 집으로 포장해갈 수 있도록 포장백도 구비되어 있어 홀로 사는 사람들의 저녁 메뉴까지도 해결해 준다. 요일마다 메뉴가 바뀌고 샐러드와 두세 개 정도의 메인 요리, 빵과 각종 치즈가 나오며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도 따로 나와 모두가 불편 없이 식사할 수 있도록 한다. 덴마크의 회사에서는 모두가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문화가 있다. 엄청나게 바쁜 사람을 제외하고선 모두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같은 음식을 나눠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한국에서는 편한 사람들과 따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었고, 미국에서도 그런 식으로 지인들과 함께 가거나 나 혼자 책상에 앉아 먹었기 때문에 불편할 일이 없었지만 사실 초반에 덴마크 회사에서의 점심시간은 내게 고역이었다. 수줍어하는 성격이 아님에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는 건 상당히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매일 랜덤 하게 바뀌기 때문에, 정말 운이 없던 날에는 덴마크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건축 역사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과 앉아 밥은 적도 있다.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아 물론, 시간이 지나 동료들과 친해지고 난 뒤에는 이 시간을 매일같이 기다리게 되었지만 :)
6. 같이 놀아볼까
몇 달 정도만 지냈던 회사였지만 동료들과 술을 마셨던 기억들은 참 많다. 왜냐하면 매주 금요일마다 원하는 대로 마실 수 있는 맥주가 냉장고에 종류별로 꽉꽉 채워지기 때문이다. 술을 좋아하는 내게 금요일의 해피아워는 천국 같았다. 여기서 워밍업을 하고 2차로 또 술을 마시러 가기도 하고, 몇 캔을 챙겨 바로 앞의 강가에서 일몰을 보며 마시기도 했었다.
해피아워뿐만 아니라 이 회사에서는 어떻게 같이 잘 놀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데, 코펜하겐 오피스에는 네 명의 이벤트 기획자들이 있었다. 회사에서 지원받는 일정 금액 안에서 트래킹을 가기도 하고, 미술수업을 받기도 하고, 무제한 칵테일바를 만들기도 하며, 50m 상공에서 장애물을 넘는 액티비티를 하기도 하거나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놀고도 모자라 이웃 디자인 회사들을 초대해 다 같이 술파티를 벌이기도 했다는 것은 비밀. 지금 돌이켜보면 같이 일을 했던 기억보다 놀았던 기억들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말 즐거웠던 모양이다.
적은 시간 동안 효율적으로 일하고,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와 함께 놀기까지 하는 이런 문화는 참 부러웠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이들 역시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훨씬 낮았을 때도 있었고, 해고 이후의 삶이 보장되지 않을 때도 있었으며 노동시간이 과중했을 때도 존재했다. 다만 한국보다 조금 더 먼저 노동자의 복지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오간 끝에 지금과 같은 회사문화가 정착되었을 뿐이다. 나는 오늘의 우리나라가 과도기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법정 근로시간이 줄어들고 최저임금이 올라가고 있으며, 출산정책이 보강되고 노동자의 처우 개선문제도 끊임없이 논의되며 긍정적인 진통의 시간을 겪어 내는 중이라고.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더 일하기 좋고 살기 좋은 환경이 되어있으리라고 믿어본다.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더 관심이 있는 분께 2017년 tvN에서 방영된 [행복 난민]이라는 프로그램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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