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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Dec 31. 2019

문학의 길, 사연을 찾아서

구병모,《단 하나의 문장》

문학과 문학하는 사람


서사들 사이에도 서사가 있다면, 단편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은 문장과 문학의 존재에 대한 서사라고 표현하겠다. 여러 편의 소설이 엮이며 발생하는 문학적 메시지는, 낱말이 엮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엮여 글을 이루는 소설의 질서를 연상케 한다. 그렇기에 소설집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문장을 말하는 문장.


서두를 여는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에는 소설가 P씨가 PC(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네티즌의 검열을 받으며 자신의 개성을 잃고 절필에 이르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P씨는 네티즌이 비판한 대로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적 관념을 작품에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상처 입힌다는 악의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함으로써 그럴듯한 소설적 세계를 구성하려는 창작자의 욕망에서 비롯된 설정이었다.


차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실제 세계를 그려내는 방식은 ‘틀린’ 창작인가, 그렇다면 소설가는 어떤 글을 쓰며 무슨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가. 근본적으로, 문학이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문학의 본질에 관한 물음과 함께 서사의 서사는 운을 뗀다.


문학에 대한 고민은 지면상 다소 거리가 있는 「사연 없는 사람」에서 이어진다. 어느 날, 한 버스 운전기사가 급성 심장마비로 정신을 잃으며 다중 추돌사고가 발생한다. 대필 작가인 서술자 ‘나’는 처음에는 이 사고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사고에 휘말린 한 신원불명의 남성이 바지 뒷주머니에 ‘나’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협조하게 되면서 ‘나’는 사건과 더 내밀하게 접촉한다.


‘나’는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건의 상업성을 더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비극적이고 영웅적인 ‘사연’을 부여하는 언론의 행태를 목격한다. 그럼에도 어떤 사연도 부여받지 못한 채 여전히 신원불명의 피해자로 남아있는 그의 외로운 죽음은 ‘나’의 창작 정신을 일깨운다.


그들의 난처함과 조바심은 아랑곳 않고 나는 눈앞의 사람에게 온 힘을 다해 존재의 이름과 더불어 새로운 서사와 질서를 부여한다. 그것이 세상 어디서도 온전한 자신의 몫을 인정받지 못하는 대필 작가이자 기획 작가이며 짜깁기 전문 이야기꾼으로서의 집필 노동자인 내가 이 세상에서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일면식 없는 타인에 대한 막연한 동정에서 비롯된 얇은 위로일지언정, ‘나’가 부여한 서사는 호명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따뜻한 노래로 다가온다. 이제 문학과 문학하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은 듯하다.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쩌면 애써 외면하는 경계 위 인간들의 삶에 소설적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 ‘사연 없는 사람’에게 사연을 부여하는 이야기꾼이 전하는 메시지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이야기들을 볼 때,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연을 부여하는 행위에 대한 고민이다. 누구에게 어떤 사연을 어떻게 부여할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앎의 폭력, 모름의 폭력


'사연'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작가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때, 그 얄팍한 ‘앎’의 저변에 얼마나 많은 ‘모름’이 깔려 있는지에 주목한다. 어떤 인간관계에 있어서든지 우리는 타인의 행동이 어떤 맥락을 가지는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우리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그 뒤에는 그 행동을 타당하게 만드는 ‘사연’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결코 섣불리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는 인간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겠지만, 사회적 권력관계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기초수급자 아이가 고급 돈가스를 먹자 센터에 항의한 시민의 이야기처럼, 어떤 앎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그 ‘앎’ 속으로 가둠으로써 누군가를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돈은 없더라도 가끔은 돈가스가 먹고 싶은 아이들을 “기초수급자는 우리의 돈을 타서 사니까 저렴한 음식만 먹어야 한다.”라는 냉정한 고정관념에 편입시키는 한 시민의 편협한 앎은 어떤 세상을 만들까.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와 「미러리즘」은 앎이 누군가에게 가하는 폭력, 아니 사실은 모름이 가하는 폭력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에는 마을 사람들이 중심인물 ‘정주’를 알려 하면서 발생하는 폭력이 드러나 있다. 남편이 전근하여 함께 시골로 이주한 임산부 정주는 마을의 전근대적 관념과 부딪친다.


마을 사람들은 ‘새댁’이 임산부로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진다. 정주의 배를 만지며 아이의 성별을 추측하고, 밭고랑에서 애를 낳았던 옛적을 떠올리며 산후조리원을 예약하는 정주에 핀잔을 준다. 구멍가게 주인과 담소를 나누자 새댁이 위험한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며 남편에게 경고하고, 친구들이 보낸 육아 기구들로 택배 기사가 자주 방문하자 외간 남자가 집에 들락거린다며 호기심을 드러낸다.


정주는 집안 살림을 십 원 단위까지 도맡는 자신의 고단한 삶에는 무관심하면서 집밖의 일들로만 자신을 아는 체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폭력을 경험한다. 정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모름은 인정하지 않는 맹목적인 ‘앎’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고 배려적 무관심을 공유하는 ‘모름’의 관계다.


우리의 앎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존재한다. 그 공간을 열어두지 않는 이기적인 앎은 타인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할 뿐이다.

국철을 타고 앉아 가다가 / 문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 살피니 / 아시안 젊은 남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 늦은 봄날 더운 공휴일 오후 / 나는 잔무하러 사무실에 나가는 길이었다 / 저이들이 무엇 하려고 / 국철을 탔는지 궁금해서 쳐다보면 / 서로 마주 보며 떠들다가 웃다가 귓속말할 뿐 /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 모자 장사가 모자를 팔러 오자 /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머리에 써 보고 / 만년필 장사가 만년필을 팔러 오자 /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손바닥에 써 보는 저이들 / 문득 나는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하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국철은 강가를 달리고 너울거리는 수면 위에는 / 깃털 색깔이 다른 새 여러 마리가 물결을 타고 있었다 / 나는 아시안 젊은 남녀와 천연하게 / 동승하지 못하고 있어 낯짝 부끄러웠다 / 국철은 회사와 공장이 많은 노선을 남겨 두고 있었다 / 저이들도 일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지 않을까
-하종오, 동승-

우리는 고개를 돌릴 수 있을까, 천연하게 동승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낯짝 부끄릴 수는 있을까.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는 모름을 인정하지 않는 ‘앎’이 폭력을 낳는 과정을 묘사했다. 「미러리즘」은 그 과정 밑에 있는 근본적인 ‘모름’의 문제에 천착한다. 우리 서로는 얼마나 다르고, 서로를 얼마나 모르는가.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남성을 향한 무차별적인 테러를 당하며 시작한다. 그 테러는 여자가 되는 약물을 주사하는 것이다.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 많은 남자 중 왜 하필 ‘나’가 피해자가 되었는지 묻게 된다. ‘나’는 “여자를 돈 주고 사본 적 없고, 원하지 않는 여자를 건드린 적 없다. 때로는 여자가 원하더라도 술에 취한 사람은 손대지 않았다.” 항상 옳게 행동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그 정도도 안 하는 남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전 여자친구도 인정했듯 ‘평타 이상’의 남자였던 ‘나’는 왜 테러를 당했을까.


한국 남자 중 평타 이상 갔던 ‘나’도 결국에는, 한국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자의 경험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해하지 못했으며, 중요한 순간에 침묵했다. 수십 년간 살아온 사회에 단 며칠 만에 분노하는 ‘나’의 변화는, 남성과 여성이 얼마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지를 환기한다.


마음 놓고 밤길을 걷는 남성과 외진 길이 두려운 여성, 성폭력을 겪을까 불안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은 분명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여성의 감각에 아무리 관심을 가져도 결국 ‘내 일’로는 삼을 수 없는 남성이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관계는 젠더 차이에서만 발생하는가. 그렇진 않다. 인간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지고, 따라서 공감에는 한계가 생긴다. 심지어 「미러리즘」의 주인공처럼 직접 여자로 변한다 하더라도, 그가 여자의 경험에 완전히 공감하게 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 이성애자와 성소수자, 비난민과 난민, 비장애인과 장애인이라는 다수자와 약자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더 넓게 말해서는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에서 완전한 공감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의 경험과 앎은 이처럼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맹신하는 앎은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 된다. 그 앎에 권력관계가 작용한다면 더더욱. 모름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앎이 있고, 그로 인해 상처 입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를 ‘아는’ 행위 뒤에는 우리가 알 수 없고, 때로는 알아서는 안 되는 수많은 사연이 있다.


사연을 부여하는 행위는, 앎으로 상처 입은 사람의 모름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리고 앎으로 상처 입히는 사람들에게 모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이다. 모름을 성찰하고 사연을 탐색하는 작업, 그러니까 문학은, 이렇게 따뜻하고 또 멋진 일이다.


오토포이에시스, 대자적 문학의 가능성


그런데 한 번 더 질문. 우리는 따뜻하고 멋진 문학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문학은, 작가 자신은 ‘글된 글’을 쓰고 있는가. 소설집의 끝을 맺는 「오토포이에시스」는 소설을 생산하는 로봇 ‘백지’를 통해 다시 문학을 말한다.


인류가 축적해온 서사들을 모두 흡수한 백지는 이야기에 질려 버렸고, 길고 뻔한 패턴이 반복되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압축할 ‘궁극의 문장’ 단 한 줄을 찾아 나선다. 그러면서 백지는 자본주의적 수익성과 수사학적 설득력을 모두 상실하고, 회사로부터 버림받아 수십 년 후의 미래에 깨어난다.


과거의 문명은 파괴된 채 최소한의 필요를 위한 언어만을 구사하는 미래 세대에서 부활한 백지는 언어의 의미를 고민한다. 백지가 찾아낸 단 하나의 문장은, 모든 의미가 해체된 언어다.


과거의 언어는 잃어버리고 다만 그 모양새만을 기억하고 있는 한 여인이 알려준, 어떤 의미도 잔존하지 않은 ‘언어’의 조합만을 남기고 백지는 잠든다. 궁극의 문장은 다름이 아니라 아무 의미가 없는 문장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것이 궁극의 문장인가? 언어란, 문장이란, 문학이란 무엇이길래.


+ 오토포이에시스: 생물의 능동적 '자기조직화'를 일컫는 용어로, 백지의 창작 행위를 빗댄다. 이 용어는 글의 생산 과정에 담긴 생명성을 환기한다. 마치 글이 살아 숨쉬고 태어나 죽는 것처럼. 글이 살아있다면 글을 죽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일까.


앞선 논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의미가 소실되고 해체된 무의미의 언어를 궁극의 문장으로 지목한 소설의 설정은, 즉자적 언어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언어를 채택하는가, 어떤 문장으로 대화하며 어떤 글로 소통하는가.


‘사연’의 공간을 열어두지 않고 자신의 앎을 절대화하는 언어로, 타인의 아픔을 살피기보다 눈앞의 이해타산을 좇는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경제적 수익과 정치적 선동만을 목적으로 하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글이 전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 밖의 목적이 개입하는 순간 글은 타락한다. 기만과 선동, 권위와 권력, 부와 명예처럼 글이 존재하기 전부터 주어지는 서사적 질서는 진실을 담아내는 글 본연의 힘을 갉아먹는다.


이런 맥락에서 백지가 적은 단 하나의 문장은 진실을 옭아매는 외부의 가짜 잣대에 대한 반격으로 읽힌다. 글 밖의 세계가 글을 잠식하여 더 이상 글이 글로 남을 수 없기에, 차라리 아무 의미도 담아내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의 문장은 글의 영혼을 축출하는 목적지향적 논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즉 ‘글의 글됨’은 회복할 수 있는지, 작가는 대답하지 않는다. 답이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하지만 문학이 대자적 존재로 거듭나는 일은 바깥 세계가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강제하는 즉자적 문학을 거부하는 데서, 혹은 적어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리라. 글되지 못한 글을 버린 결과 얻은 단 하나의 문장도 글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이 가진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따름이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배고픈 사람을 구하지도 못하고 권력을 약속해 주지도 못하며 큰돈을 벌어다 주지도 못한다. 문학은 써먹지 못한다. 다시 말해 유용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용한 것은 유용하다는 이유로 인간을 억압한다. 반대로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대신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인간에게 억압의 정체를 파악하게 해 주고 반성에 이르게 한다.

문학비평가 김현이 《한국 문학의 위상》에서 문학과 억압에 대해 언급한 바를 간추린 것이다. 문학은 유용하지 않고, 따라서 억압하지 않는다.


하지만 백지가, 작가가 목도한 문학은 달랐다. 의미에 잡아먹혀 왜곡되는 글과 그러한 문학으로부터 소외된 사연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다면 40여 년 전에 제출된 김현의 명제는 오늘날의 현실에 맞추어 다시 쓰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다시 쓰자면 문학은 억압한다. 문학이 언제나 억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써 긴장하여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 비판하며 살펴보지 않으면, 문학은 언제라도 인간을 억압할 수 있다.

문학은 지금까지 유용했고 따라서 억압했기에, 오늘날 문학에 주어진 과제는 “긴장하여 성찰하고 비판하며 살펴보는” 일이다.


그래서 백지는 의미를 버렸고, 작가는 사연을 떠올렸다. “날마다 한 줄씩 쓰고 버리며”, “쓰기에 대해 거듭하여 고민”하였다. 문학은 끊임없이 고민할 때 해방적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구병모의 문학은 해방적이다.




구병모, 《단 하나의 문장》, 문학동네, 2019

인용한 시 (하종오 시인의 '동승') 출처 블로그 https://story.kakao.com/ch/claudia-yoon/gUonMab6g80

마지막 문단의 재인용구, 인용구 - 소영현 등, 《문학은 위험하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과 독자 시대의 한국문학》민음사, 2019 중  「문학은 억압한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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