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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an 02. 2020

너는 그랬다.

윤이형의 「루카」, 김혜진의 「동네 사람」, 박상영의 「재희」

‘그들’


우리는 소수자들을 어떻게 호명하는가. “그들도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들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소수자의 인간다운 생활을 주장하는 담론조차,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들’이라는 존재를 상정한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틀로밖에 인식하고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우리 언어의 한계이자, 우리 사고의 한계이다.


소수자가 ‘우리’와 같은 존재로 서기 위해서는, ‘그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와 다름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리라. 우리처럼 사랑하고, 이별하고, 관계맺고, 갈등하는, 당연한(!) ‘보편적 인간됨’에 합의해야 하리라.


윤이형의 「루카」, 김혜진의 「동네 사람」, 박상영의 「재희」는 ‘우리’라는 공고하고 배타적인 테두리를 허물고 소수자를 이야기한다. 원래 방금 문장에서 작가들의 치열한 고민이라는 상투적인 문구를 썼었는데, 쓰고 다시 지웠다. 이 이야기가 치열한 이야기라는 식으로 글을 쓰게 될까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작가의 고민은 치열할지언정 이야기는 그렇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세 소설은 너무도 당연하고 소박한, 인간의 이야기다.


‘우리’가 되는 방법


「루카」는 ‘딸기’와 ‘루카’, 남성 동성애자 커플의 이야기다. 소설에는 게이를 향한 여러 차별과 폭력이 등장한다. 딸기는 커밍아웃하고, 부모님을 설득하지만 아직까지 따끔거리는 이야기만이 남는다. 루카는 아우팅당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가족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루카」를 퀴어의 아픔에 대한 소설로 분류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 작품이 가진 특별한 힘은, 딸기와 루카의 소박한 연애 이야기에 있다. 퀴어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예전처럼 이어폰을 나눠 듣지 않는 사소한 이유로 사랑이 식었음을 느낀다. 같은 게이로서 사랑에 빠졌지만, 가족관계를 유지한 기독교인 루카는 가족관계를 단절한 비기독교인 딸기와 다른 존재였고, 둘은 다툰다.


서로에 매력을 느꼈지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이별한다는 흔하디 흔한 연애 이야기. 흙수저 여자와 금수저 남자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경제적 여건의 차이로 이별하는 아침 드라마의 내러티브가 겹쳐보이지는 않는가.

 

딸기와 루카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돌고 돌아 ‘우리’의 이야기로 포섭된다. 「루카」는 더 이상 게이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도 평범하게 연애하며 사소하게 이별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루카’의 원래 이름은 ‘예성’이었다. 딸기는 루카는 사랑했지만 예성이는 사랑하지 못했기에 헤어졌고, 아버지는 예성이는 사랑했으나 루카는 사랑하지 못했기에 갈등했다.


그러나 루카를 회상하며 딸기는 예성이까지 추억한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 한편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의 고속도로 한복판을 걸으며 “오래전에 죽은(실은 죽었다고 믿은) 자신의 아들, 너를 떠올린다”. 아버지가 “주님의 품에 받아달라”고 기도한 아들은 예성이인 동시에, 루카였으리라.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예성이를 사랑하고, 루카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 루카도 예성이만큼 ‘우리’가 될까.


숨김의 재현법


한편 「동네 사람」에는 여성 동성애자 커플이 나오는 ‘듯하다.’ 중심인물 ‘나’와 ‘너’의 관계를 확정할 만한 근거는 소설에 없다. 두 여성이 연인이 아닐까 하는 애매모호한 실마리만이 소설 곳곳에 숨겨져 있을 따름이다. 왜? 아마 소설의 정체성이 퀴어라는 장르에 잡아먹히지 않기를 원해서, 더 나아가 잡아먹히지 않는 재현법과 독법을 말하고 싶어서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성애자의 연애를 다루는 ‘보통의’ 소설은 주인공의 연애가 이성애임을 장황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것이 전제되어 있기에, 그것이 표준이기에. 반면 그 표준에 어긋나는 동성애 소설은 그 사랑의 방식을 명백히 써놓아야 하고, 그 특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도 그러라고 시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인식하고 창작하며 소비하고 독해한다.


작가는 이 은밀한 구조에 대항하여 ‘나’와 ‘너’ 사이의 관계의 정황을 감추고 서사를 전개한다. 소설의 재현 방식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은 소수자를 어떻게 재현했고, 그에 앞서 우리는 소수자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소설이 감춘 것이 관계만은 아니다. 소설은 ‘너’가 뺑소니 용의자로 몰리는 핵심 사건의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을 뺑소니 피해자라 자처하는 할머니와, ‘나’와 ‘너’를 의심하는 동네 사람들. 동네 사람들의 시선에 타협하려는 ‘나’와, 자신의 결백을 항변하는 ‘너’. 할머니의 주장과 동네사람의 의심은 타당한지, 아니면 진짜 ‘너’가 결백한지. 사건의 전말은 철저히 숨겨둔 채, 서사는 팽팽한 긴장과 함께 진행된다.


이 긴장 속에서 우리는 두 인물을 억압하는 힘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범죄 사실이 억압을 뒷받침하지도 않고, 반대로 결백이 드러나 그들을 억압하는 거짓 정보를 고발하지도 않는다. ‘나’와 ‘너’를 공격하는 것, 그리고 소설이 문제화하는 것은 사실도, 거짓도 아니라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다. 다시 말해 진 또는 위의 정보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이방인’에 대한 관념 그 자체다.


이는 현실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는 수많은 “팩트”들을 생각하게 한다. 혐오는 혐오를 뒷받침하는 사실로써 발생하는가, 아니면 혹시 그 뒤에는 그저 누군가를 혐오하고 싶은 충동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혐오와 배제, 아니 혐오와 배제의 ‘정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 혐오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문학은, 인식은, 가능한가.


혁명과 재현


앞의 두 소설이 연인들의 이야기라면, 「재희」는 조금 다르다. ‘재희’와 ‘영’은 친구다. 성정체성으로 말하자면 재희는 여성이고, 서술자 영은 게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친구로서 동거할 수 있음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은 잘 모르고 그다지 관심도 없는 타인들이 보기에 둘의 관계는 부적절하다. 더욱이 재희와 영은 각자 소위 말하는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는 인물들이기에, 삶 곳곳에서 따가운 말과 시선을 경험한다. 재희와 영의 담담한 한탄은 이들의 삶을 응축한다.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 모르지.”


그치만 「재희」가 한탄의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두 인물의 당찬 태도는 소설에 따뜻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비뇨기과 간호사들로부터 “똥꼬충”이란 말을 듣고도 푸하하 웃어버리는 영과, 산부인과의 “꼰대” 의사로부터 정결한 성생활과 자궁의 숭고함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고는 병원의 자궁모형을 들고 도망치는 재희.


이 둘의 코믹한 성격은 소설 곳곳에 나타나는 짜증나는 상황들을 유쾌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차별과 억압으로 점철된 답답한 삶을 이처럼 밝게 비추는 작가의 시선은 실로 대범하다.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방금의 ‘답답하다’라는 표현에 조심스러워진다. 그들의 삶은 답답할까? 그에 앞서 내가 감히 그들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할 자격은 있을까? 남성의 삶이 하나가 아니고 여성의 삶이 하나가 아니듯이, 퀴어의 삶도 하나가 아니다.


퀴어는 집단으로서가 아니라 퀴어 개개인으로서 존재한다. 루카처럼 아우팅당한 기독교인일 수도, 딸기처럼 커밍아웃한 비기독교인일 수도 있다. ‘나’처럼 사회적 시선에 타협할 수도, ‘너’처럼 완고하게 거부할 수도 있다. ‘똥꼬충’이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처럼 푸하하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사회구조적 억압의 부조리함을 인식하고 개선을 말하는 것은, 억압받는 자들의 삶에 ‘부조리’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약자를 배제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일과, 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이해하는 일의 차이라고 표현하면 더 선명할까.


전자를 사회학과 혁명의 고민, 후자를 문학과 재현의 고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사회학과 문학은, 혁명과 재현은 뜻을 같이해야 하리라.


사회구조가 가하는 폭력을 말할 때, 그 폭력과는 별개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다층적 정체성의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한 인간의 삶을 재현할 때, 그 개인의 삶 속에 사회구조가 새겨져 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너는 그랬다"


「루카」, 「동네 사람」, 「재희」는 각각 소수자를 호명하고 그리는 방식에 대한 제각각의 고민과 물음을 담고 있다. 호명과 재현의 문제에 단일한 정답은 없다. 오히려 하나의 방식을 규정하고자 하는 도전은 소수자를 그 방식의 틀 속으로 가두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기에 소설의 재현법은 겸손하다. (소수자인) 너는 어떤 존재라고 함부로 말하고 규정할 수 없는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볼 때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에 힘을 싣는다.


세 소설 중 어느 하나도 감히 너의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오만함을 취하지 않는다. 한 발 물러나 딸기와 ‘나’와 영이라는 한 인물의 시점에서, ‘너’(루카, ‘너’, 재희)라는 인간을 담담히 바라볼 따름이다.


-  예성이와 루카 사이에서, 소수자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

- ‘너’는 진짜 뺑소니의 범인인가 아닌가, 동네 사람이 너를 아프게 하는가 아니면 내가 아프게 하는가.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성찰.

- 영과 재희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소수자가 아프다(A하다)라는 서술이 은연중에 아파야 한다(A해야 한다)로 확대되진 않는가 하는 고민.


소수자는 누구다/어떻다.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들은 사실 각기 다른 인간들이니까. 글 서두에서 말한 소위 ‘보편성’은, 오히려 그 존재의 특수성에 주목할 때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의 시선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딸기와 ‘나’와 영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랬다.”




윤이형, 「루카」,《제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5

김혜진, 「동네 사람」,《작별: 2018년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행나무, 2018

박상영, 「재희」,《대도시의 사랑법》, 창작과비평,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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