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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an 12. 2020

나쁜 사람은 없다 <1>

한나 아렌트와 지그문트 바우만 

평범한 폭력


‘폭력’. 이 단어가 사람들에게 환기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비슷한 듯하다. 옆의 그림은 구글에 ‘폭력’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을 때 처음 등장하는 이미지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그림. 다른 맥락을 똑 떼어놓고 생각하면 나쁜 가해자가 잘못했고 선량한 피해자가 당했다는 이분법적 구도가 그려지기도 한다.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백설공주를 살해하려는 왕비처럼. 선과 악의 대립을 상정하는 것은 동화가 아이들이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흔히 채택하는 스토리라인이다.


현실로 눈을 돌려볼까. 현실은 우리가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야기를 꺼내려면 모두 합의할 만한 아이히만이 좋겠다. 나치당 소속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단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 항변하는, 뻔뻔하다면 뻔뻔하고 멍청하다면 멍청한 인물.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의 악행이 악한 심성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단지 사유의 빈곤에 지나지 않는지 어느 한쪽으로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이처럼 현실에서는 선악을 칼로 물 베듯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잔악한 죄인, 당한 사람은 순수한 피해자라고 말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현실의 선악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는 뜨뜻미지근한 주장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질문해보자. 무엇이 선악을 나누기 어렵게 만들었을까? 왜 우리는 아이히만을 악인이라 단정할 수 없고, 선과 악을 단언할 수 없을까?


조금 진부해졌더라도 한나 아렌트의 논의를 참고하자면, 아이히만이 대학살을 승인하게 만든 것은 그의 사악한 인간성이 아니다. 아이히만은 너무나 평범하고 시시한 인간이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것은 다만 자신의 행동을 성찰할 수 없게 만든 “순전한 무사유”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너무 연약한 나머지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산산조각 나고 만다.



하지만 왜? 무엇이 그렇게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이길래 인간은 애써 사유해야 할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발견한 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박탈하는 ‘현대성’이다. 그의 저서《현대성과 홀로코스트》 비합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구조를 고발한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목표를 향해서 가장 합리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적 조직 문화,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현대적 과학 기술이 홀로코스트를 낳았다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비인간적 사회구조, 당시에는 ‘현대성’의 이름을 가졌던 무언가. 바우만이 목격한 폭력의 민낯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어떤 폭력, 어떤 악을 목격함에도 선과 악을 선명하게 나눌 수 없는 이유는, 그 악이 악의를 띠지 않고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악은 악의가 아니라 오히려 무사유로써 작동한다. 한편 악에서 악의를 도려내는 것은 바우만이 짚어냈듯이, 사회구조다.


아이히만은 나쁜 사람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각자의 고유한 심성을 가진 수많은 개인을 폭력을 향한 단일한 욕망 앞으로 모아놓은 존재는 바로 사회구조다. 아렌트가 배태하고 바우만이 완성시킨 하나의 통찰은 사회적 폭력을 개인의 선악으로 치환할 수 없고, 나아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이 과거 나치당의 인격적 결점에서 출발한다면 홀로코스트는 결국 다른 인간의 책임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무사유가 그처럼 끔찍한 비극을 낳았음을 기억한다면, 홀로코스트를 단지 과거의 타인이 저지른 죄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눈앞의 위협으로 인식한다면,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일이 되고 의미 있는 반성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나치 전력을 가진 독일인 우리인 동시에 그와 같은 폭력을 재생산할 가능성을 가진 전 세계의 우리일 것이다.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순전한 무사유”는 “하이드의 얼굴”을 숨긴 채 우리를 노려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사유를 멈출 수 없다.


평범한 폭력의 새로운 얼굴


과거의 폭력을 언제까지라도 부단히 반추해야 할 당위성에 합의했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홀로코스트를 생각할 수 있을까. 또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목격한 눈으로,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의 폭력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과거의 폭력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았나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된다.


홀로코스트 당시에는 합리성과 현대성의 이름을 띠고 수많은 유대인의 죽음을 생산한 사회구조는, 지금은 혐오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누군가의 사회적 죽음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인종적 우위와 열위를 부여하고 열등한 유대인을 ‘청소’하게 만든 것이 단지 괴벨스의 선동만이 아니라 동시에 대중의 무사유였다면, 여성과 성소수자, 노동자 등 힘없는 존재를 혐오적으로 호명하고 공격하는 오늘날의 정동 역시 대중의 무사유에 기인하지는 않는가.


아렌트와 바우만이 터놓은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거기에 숨겨져 있던 홀로코스트적 무사유가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방향과 모양의 폭력은 힘없는 이들에 대한 ‘무사유’라는 밑바탕을 공유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조를 비난하고 호모포비아와 제노포비아를 설파하며 여성을 품평하는 이유는, 그들을 미워하거나 무시하기에 앞서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질병에 걸린 동료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앞에서 강성노조를 이야기할 때, 유사과학 지식으로 성소수자의 사회적 삶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 난민과 강력범죄에 관한 왜곡된 통계로 갈 곳 없는 자들의 생존을 차단할 때, 남성이 느끼는 성적 매력을 잣대로 여성의 인격을 순위 매길 때, 이들이 얼마나 상처 입는지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공격받는 현상 뒤에 단순히 나쁜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편하겠지만, 실제로는 사유하지 않는 평범한 이들이 폭력을 저지르게 이끄는 힘이 존재한다. 노동자, 난민,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원인을 ‘나쁜’ 회사, 국민, 남성, 성적 다수자에게서 찾는 일은,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아이히만들의 악함에서 찾았던 아렌트 이전의 논의와 다름없다.


서두에서 언급한 선악의 프레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인을 추동했고 지금은 우리를 추동하는 은밀한 사회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폭력, 혹은 ‘악’의 작용 그 배후에는 악의를 가득 품은 추악한 인간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손바닥 위에서 나풀대는 무사유의 꼭두각시가 자리한다. 즉, 이 이야기에 나쁜 사람은 없다.



여기까지가 사회학의 언어다. 현실 세계의 경험에 천착하여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질서와 구조를 ‘추상적으로’ 스케치하는 일. 현실의 일이지만 현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사회학의 특장이지만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사회학이 현실의 한 계단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그 무언가를 다시 현실의 층위에서 그려내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


필자는 문학을 호출하고자 한다. 무언가를 제하고 무언가를 남기는 재현의 과정에서 사회학의 시선을 가지며, 동시에 현실의 언어로 현실의 이야기를 하는 문학. 말하고자 하는 현실과는 한 발 떨어진 추상의 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사회학에게, 그 눈을 이어받되 여전히 현실의 입을 가진 문학은 새로운 힘을 준다. 문학으로 눈을 돌리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현실의 언어로,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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