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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an 12. 2020

나쁜 사람은 없다 <2>

손보미 「임시교사」, 김혜진 「어비」, 황정은 「파묘」

그럼 이제 문학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임시교사」와 「어비」, 「파묘」는 개인을 억압하고 상처 입히는 폭력을 그리지만, 나쁜 개인 대신에 차가운 사회가 자리한, 동화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를 묘사한다.


평범하고 당연하게


「임시교사」의 중심인물 ‘P부인’은 제목대로 임시교사다. 스스로 정식교사가 되는 것을 바랐지만 “그건 어쩐지 올바르지 못한 일처럼 여겨졌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하면서도 아이와 밥 한 끼조차 함께해본 적 없고, 그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라는 아이 엄마의 말에도 집의 그 무엇에도 손을 대지 않는다. ‘임시’라는 ‘주제’에 걸맞은 처신이다.


가끔 P부인이 ‘주제넘은’ 행위를 하는 장면에서, 그는 그 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는다. 아이 앞에서 다툰 아이 부부에게 충고했을 때, P부인의 ‘오지랖’에 사모님은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고 P부인은 남편에 의해 이해해줘야 할 “불쌍한 여자”로 전락한다.


또한 가족이 곤경에 빠졌을 때까지 두 팔 걷어 희생해 집안 더욱 내밀한 곳에 진입하지만, 사모님이 소중히 여기는 찻잔을 감히 즐겨 사용함으로써 해고당하고 만다.


아무리 헌신적이고 유용한 인물이라도, 임시직의 노동자 P부인은 결국 언제든 내칠 수 있는 손쉬운 타자에 지나지 않는다. P부인은 작품 내내 ‘정식’의 인간이 되지 못한 채로 소외되고, 스스로의 의지를 따를 주체성 없이 타인에게 쉽게 재단되고 이용당한다. P부인이 노동하고 해고당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독자는 P부인이 경험하는 여러 종류의 폭력을 감지한다.


하지만 「임시교사」의 세계 어디에도, 그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인물은 없다. 소설은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작품 표면에 드러난 억압 요소는 P부인을 쉽게 재단하고 이용하며 타자화하는 부부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 억압이 부부의 악한 행동양식이나, 조금 더 확대하여 부덕한 상류층의 노동 착취를 고발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렌트 이전의 이해에 불과할 것이다.


아렌트의 언어를 빌려오자면, 우리는 여기서 무사유를 발견한다. P부인을 억압하지만 그것을 억압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무사유. 부부도, P부인도, 누구도 악의는 없다.


그런 한편 생각하지 않는다. 왜 P부인은 자신이 정식교사가 되는 상상을 올바르지 못하다 여기는가. 왜 자신이 양육하는 아이와 밥 한 끼 함께하지 못하는가. 왜 찻잔 따위의 이유로 해고당해야 하는가. 악의가 아닌 무사유로써, 폭력은 평범하고 당연하게 발생한다.


이는 단지 P부인을 억압한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억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아가 스스로를 임시 노동자의 테두리 안에 가둔 P부인의 문제이기도 하다.


단지 사유하지 않음이 억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말하면서, 문학은 다시 사회학을 호출하리라.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지만, 그들의 무사유가 억압을 낳는 이유를 찾으려면 바우만의 시선을 빌릴 수밖에는 없다.


무사유가 낳는 폭력 그 뒤에는 임시/여성/양육/노동자를 억압하는 사회구조가 있다. ‘정식’이 되지 못하는 임시를, ‘남성답지 못한’ 여성을, ‘경제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는 양육노동을, ‘자본가에 빌붙어’ 먹고사는 노동자를 타자화하는 사회구조.


여기서는 나쁜 주체도 착한 객체도 없다. 사회구조를 체화한 모든 인간은 위에서 아래로, (스스로를 포함해) 힘없는 것들을 짓누르며 살아간다.


사유하지 않는 한.


잠깐, 사유란 무엇일까. 필자는 임시교사의 일화를 보며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눈앞의 폭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비판하며 나아가 더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는 인간의 상상력. P부인은 일생에 걸쳐 억압적 사회구조를 체화하였고, 사회적 억압을 인식할 수 있는 수준의 상상력조차 박탈당했다


 폭력은, 단지 누군가를 때리고 짓밟는 게 아니라, 그 공격과 억압에 저항할 상상력을 빼앗는 데서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유의 가능성은, 더 밝은 앞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망울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악한 약자와 언더도그마-도그마


「임시교사」에 나쁜 사람이 없었다면, 「어비」는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도. 「어비」는 서술자 ‘나’가 ‘어비’를 관찰하는 이야기다. ‘나’와 어비는 모두 노동자다. ‘나’는 상사로부터 갑질당하고, 어비는 직장 내 따돌림을 겪는다는 점에서 모두 나름의 폭력을 겪고 있다. 아렌트 이전의 유아적 이해로는 ‘나’와 어비가 착하고 상사와 직장 동료는 나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포스트 아렌트적 해석을 요구한다. 이 소설에 착한 피해자는 없다. ‘나’는 직장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대신 “더 나은 일”을 찾아 “제대로 취업”하려고 한다.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싸우지는 않는다. 당장의 부조리는 ‘덜 나은 일’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억압받는 지위에 놓인 노동자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겪는 차별을 정당하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기는커녕, ‘차별받지 않아도 되는’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할 뿐이다. 자신이 받는 차별의 부당함을 인식하지 못하며, 오히려 위에서 당한 폭력을 아래로 행사하는 ‘나’는 약자일지언정 결코 선한 인물은 아니다.


한편 어비는 자신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덜 나은” 직장을 떠나, 인터넷 방송의 BJ가 된다. 배척당하고 차별받은 약자이므로 어비는 선하고 건전한 컨텐츠를 생산할까? 전혀.


어비는 2015, 2016년 즈음의 인터넷 컨텐츠 시장을 반영하듯, 추하고 불건전한 BJ가 된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한 창고를 나로호 발사 장소라고 시청자를 속이기도 한다. 어비도 약자지만, 도덕성은 별개의 문제다.


소설이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것은 소설 속 폭력이 개인의 선악과 별개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나’와 어비가 겪는, 또 ‘나’가 어비에게 내리전하는 폭력은, 선악이 아닌 무사유에서 출발한다.


‘나’는 사유하지 않은 결과, 자신이 겪는 부당한 대우를 체화한다. 누가 차별받아 마땅하고, 누군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나아가 누가 차별할 수 있는지를 학습한 ‘나’는, 자신이 겪은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더 약한 대상을 물색한다. 그래서 ‘나’는 어비를 발견한다.


어비는 같은 노동자였지만, 모난 성격 때문에 직장 상사로부터 미움받고 동료로부터는 무시당하는, 말하자면 ‘을 중의 을’이었다. 그 후 인터넷 BJ가 된 어비를 보며 ‘나’는 “저런 걸로 돈을 버는 한심한 사람”이라 비난하고, 자신의 초라한 처지로 인한 분노를 자신보다 약한 어비에게 표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속된 말로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사회에서는 누구에게 한 마디 하기도 두려워하지만, 자신보다 차별받으며 ‘천박한’ 직업을 가진 어비를 향해 혐오의 언행을 배설하는 ‘나’라는 인물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겐 하염없이 유순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자에겐 발톱을 드러내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유하지 않는 꼭두각시들의 제1 생존철칙이다. 그 생존철칙을 습득하는 것은 강자와 약자, 악인과 선인을 초월한 이 사회의 (사유하지 않는) 모든 인간이다.



차별에 고통받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도 차별을 내면화한 약자들의 모습을 보면, 미국의 보수 논객 마이클 프렐이 제시한 ‘언더도그마’ 개념이 떠오른다. 마이클 프렐은 「언더도그마」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권력을 그 개인의 도덕성과 결부시키는 ‘진보주의의 오류’를 비판한다. 힘을 가진 이들을 악의 진영으로 밀어 넣고, 힘없는 이들에게 가짜 선량함을 부여하는 비이성적 경향성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의 주장은 절반 사실이다. 「어비」에 드러나 있듯이 갑질하는 상사와 따돌림하는 직장 동료보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나’와 가짜 컨텐츠를 생산하는 어비를 선하다 말하기는 어렵다. 개인이 가진 힘과 그 인간의 도덕성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자신보다도 힘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악한 약자들은 때때로 비난의 화살을 받는 악한 강자들과 다를 바 없다. 말 그대로 모두가 강약약강의 인간일 따름.


그럼에도 언더도그마라는 개념이 언더도그마-도그마로 흐르는 상황은 우려스럽다. 약자는 선하지 않으므로 ‘무비판적인 도움’은 경계해야 하는가, 악한 약자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닌가. 진보주의가 약을 선으로, 강을 악으로 상정한다고 비판한다면, 그 발화는 혹시 우리가 보호하는 약이 선량해야 한다는 관념을 전제하지는 않는가.


약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 강에서 악으로의 폭력을 막아야하는 이유는 약이 선이고 강이 악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폭력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유하지 않는 약자도 강자와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의 위계구조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사실은, 사회구조의 비인간성을 더 날카롭게 드러낼 따름이다.


개인의 선악과는 별개로 작용하는 구조적 폭력은,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의 감각으로 누군가를 옭아맨다. 우리가 사유하지 않는 한, 상상하지 않는 한, 일상의 억압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테다.


나쁜 사람이 없는 이야기


나쁜 사람은 없는 「임시교사」와 반대로 착한 사람이 없는 「어비」를 읽었다면, 폭력과 억압이라는 이야기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점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식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선도 악도 없이 발생하는 폭력의 작용이 취하는 일상의 감각을 이야기할 준비는 마쳤다. 「파묘」는 그 일상의 감각에 우리를 초대한다.


소설은 한 씨 가정의 이야기다. 작가는 할아버지의 묘를 옮기러 간 이순일-한세진 모녀의 여정 사이사이에, 장녀 한영진과 장남 막내동생 한만수까지 포함한 가족 전체의 이야기를 삽입한다. 할아버지의 묘를 옮기는 다소 구시대적 관습이 소설의 핵심 줄기라는 데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왜 성묘 문화가 시들해졌을 뿐 아니라 친척관계조차도 소원해진 지금 2019년에 와서 파묘와 낡은 가풍을 재현하는가.


소설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10, 20년 전에 있을 법한 상황들이다. 가문에 속하지도 않는 ‘아저씨’들이 독단적으로 파묘하는 데서 느끼는 짜증. 성묘에 열심이었던 둘째 딸 한세진 대신 뉴질랜드에 나가 있는 막내아들 한만수가 (별 가치도 없는) 뒷산을 상속받는 데서 느끼는 불편함. 아들 한만수가 전한 작은 프레젠트 메시지(어머니는 위대하다)에는 눈물을 훔치면서도 매년 성묘에 동행했던 딸 한세진의 노고는 당연시하는 어머니 이순일의 이중적 태도를 보며 한세진이 느끼는 서운함.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며 남녀 평등한 상속제도가 갖춰진 오늘의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소설을 단지 오래된 차별적 전통의 뒤늦은 재현이라고 평면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나아가 작가가 파묘라는 소재를 지금에서야 채택한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과거의 홀로코스트를 오늘 우리의 일로 만든 아렌트와 바우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차별적 전통이 옛사람의 악한 심성이 아니라 단지 당시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사유의 부족이었다는 점을 인식할 때,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더 많은 사람을 생각할 힘을 얻게 된다. 오늘의 우리가 사유하지 않는 누군가는 없는가. 우리의 언어를, 사고를,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매만질 가능성은 없는가. 둘의 사유는 파묘 풍습을 2019년에 재현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순일과 한세진의 불편한 파묘에서도, 가정 내의 불공정한 대우에서도, 나쁜 사람은 없었다. 제사는 남자가 이끌어야 하고, 재산은 아들이 우선이어야 하며, 딸보다는 아들이 소중했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모름지기 그래 왔고, 따라서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폭력은 항상 그러한 둔감함으로 유지된다.


2019년, 그리고 2020년 파묘와 낡은 가풍을 읽으면서 우리는 한 씨 가정을 어딘가 시대착오적이라 느낀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문화도 미래의 독자는 어딘가 시대착오적이라 느끼지 않을까. 현재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인식을 상상력으로써 의심하는 일이 다름 아닌 사유리라. 사회가 시키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이따금씩 멈추어 온 길을 되돌아보며 갈 길을 살피는 일. 우리는 잘 돌아보며 살피고 있는가.



며칠 전은 필자(이하 나)의 생일이었다. 또 사촌누나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모처럼 친척들이 다 모였다. 작은고모는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가 만족한 목소리로 아들이라 전했다고 회상하셨다. 하는 말로 요즘은 딸이 귀한 시대니, 아빠는 부정하셨지만. 나는 그날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던 사촌누나가 느낄지 모르는 불편함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런 회상 아래에는 한때 딸이었던 고모의 삶이 있기에, 따라 웃지만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마 아니리라 믿지만) 만족하신 아빠가 나쁜가, 그렇게 회상하신 작은고모가 나쁜가, 알면서 침묵한 내가 나쁜가. 나 스스로 나를 나쁘지 않다 말하는 것은 오만일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에도 나쁜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아들을 딸보다 귀하다고,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사회가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유하고 상상하는 일뿐이다.




<1>

한나 아렌트,《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지그문트 바우만,《현대성과 홀로코스트》, 정일준 옮김, 새물결, 2013


<2>

손보미, 「임시교사」,《문학동네 81호 - 2014.겨울》, 문학동네, 2014

김혜진,《어비》, 민음사, 2016

황정은, 「파묘」,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9

곁 생각 - 마이클 프렐, 《언더도그마》, 박수민 옮김, 지식갤러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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