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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an 27. 2020

아픈 마음에게, 함께하는 마음을

한강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김금희《경애의 마음》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金盞花)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 윤동주, 병원 -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윤동주 시 ‘병원’의 주인공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는 구절에서 그러하다. 인물의 마음이 다치고 다시 아물어가는 문학적 여정에 동행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낫기를 소망하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만큼 문학과 글에서도 위로를 얻는 것을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온기와 별개로 문학이 전하는 온기도 있는 듯하다. 전자를 직접 전달되는 전도열이라 한다면, 후자는 그런 따뜻한 관계에서 느껴지는 복사열이라 할 수 있을까.


시대적 현실을 담아내거나 미적인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만큼, 작품 안팎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일도 문학의 주요한 관심사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과 김금희의《경애의 마음은 그 치유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다. 두 소설을 읽을 때도, 우리는 누군가의 자리에 누워보며 그 사람의 마음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곱씹는다. 인물의 아픔, 나아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사유한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은 아픈 마음이 어떻게 하면 평화를 얻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k씨는 눈이 소복이 쌓이는 어느 날, 3년 전 죽은 임선배와 조우한다. k씨, 임선배, 경주 언니의 마음이 교차하는 사건의 내막은 가려진 채, 소설은 두 인물의 담담한 진술로 전개된다. 언제는 경주 언니와 임선배가 갈등하고, 또 언제는 셋이 월미도로 놀러가는 무질서한 회상 속에서, 독자는 대화 사이사이에서 섬칫 나타나는 두려움만을 감지할 뿐이다.


두 인물의 대화에 져 있는 짙은 그림자를 의식할 때쯤, 윤선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자 직원은 결혼과 함께 퇴사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사칙에 출근 투쟁으로 맞선 윤선배의 이야기. 흔한 결말이 그러하듯, 사측의 편법으로 노동자측의 투쟁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 사건은 여러 마음에 흉터를 남긴다. 노동쟁의가 실패해 떠난 윤선배의 마음, ‘나의 일’이 아닌 출근 투쟁에 동참하지 않은(못한) 임선배의 마음, 그런 임선배를 바라볼 수 없게 된 경주 언니의 마음, 쫓겨난 윤선배의 자리에 들어와 그 모든 아픔의 심연을 마주한 k씨의 마음. 사전적 정의대로 평화를 “일체의 갈등 없이 평온한 상태”라고 한다면, 이들이 얻을 수 있는 평화는 남의 고통에 눈감으며 느끼는 이기적인 평화뿐이다.


이때 평화란고통보다 두려운 것이다.


k씨가 두려워한 것은 윤선배, 임선배와 경주언니의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 트라우마에서 눈을 돌린 채 이기적인 평화를 찾는 k씨 자신이다. 그래서 k씨는 끊임없이 아파한다. 누구의 마음도 잊지 않는다. 견디지 못할 만큼 아파하면서도, 그로부터의 해방에는 격렬히 저항한다. 타인의 고통을 툭툭 털어내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 더 많이 기억하고 사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한강은 평화를 발견한다.


함께 가는 마음. 누구의 마음도 잊어버리지 않고, 모두의 마음과 함께 있는 마음. 공감 없는 희망의 말을 던지기보다는, 아무 말 없더라도 그저 아픈 이의 곁을 지키는 마음. 누구보다 아팠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기억했기에, k씨는 임선배를 떠올린다. 그때 눈이 내리고, 평화가 내린다.


이제 손을 꺼내 눈을 향해 내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손은 얼마나 차가울까. 거기 닿은 눈은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눈 한송이가 녹지 않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순간 내가 그와 악수를 나눈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공손하거나 가볍게 목례했을 뿐, 가장 담담한 예의를 갖췄을 뿐이었다. 한번의 꿈속뿐이었다, 잠시 우리가 닿았던 것은. 내가 그의 딸아이만큼 어려져서 무릎에 앉았을 때. 


이제 밝아지려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직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마치 검푸른 허공에 멈춰서려는 듯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들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우리의 눈과 눈이 만났다. 평화를.


평화는, 곁을 지키는 마음에 있다.

고통에, 슬픔에 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


경애의 마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이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부단한 반추의 서사였다면,《경애의 마음》은 그보다는 담담하더라도 “마음을 다해” 아픔에 함께하는 치유의 서사다. 경애와 상수는 아픈 마음을 지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소설의 섬세함 덕분에 우리는 경애의 자리에 누워보고, 상수의 자리에 누워볼 수밖에 없게 된다.


경애는 살면서 자주 넘어진 인물이다. 학창 시절 영화 동호회에서 어울리던 친구들을, 그리고 사랑하던 E를 화재로 잃는다. 하지만 돈을 내고 가라며 문을 잠근 사장님에게, 술집에서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질타하는 어른들에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파업 활동을 하다가 성희롱을 당한다. 경애가 이를 고발해 파업은 수포로 돌아가고, ‘동지’였던 사람들은 경애를 비난한다.


지금은 대학 시절부터 만나다가 자신을 떠난 산주 선배와의 관계로 넘어져 있다. 선배는 이미 유부남이 되었지만, 이별이 너무 아팠던 경애는 그 관계를 애매하게 붙들었고 그때부터 홀로 일어서는 법을 잊고 살아왔다.

 

이때 경애를 일으켜 세워준 사람은, 의외로 서먹서먹한 직장 동료인 상수다. 여자인 척을 하면서 고민 상담 페이지를 운영하던 상수. 그는 경애와 산주 선배의 관계가 ‘마음 착취’라며 길길이 뛰었지만, 경애가 그 관계를 놓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의 결론을 열심히 쥐어짜낸다.


“마음을 폐기할 필요는 없어요.”


화재는 우리가 탓인가, 파업에서 동지의 성희롱을 고발한 행동은 배신인가, 힘듦을 견딜 수 없어 구남친과의 관계를 붙잡는 마음은 불륜인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어 묻어둔 그 마음에게, 폐기할 필요가 없다는 한 마디는 구원이다. 마음 곁을 지킬 때만 할 수 있는 말. 마음은 폐기할 필요가 없다. 그 말 덕분에 경애는 역설적으로 떠나간 사랑에 기대지 않고 홀로 일어난다.


한편 상수가 경애에게 전한 그 마음은 다시 상수에게로 돌아온다. 어느 날 상수는 연애상담 페이지의 계정을 해킹당해,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상담도, 해외 파견도, 짝사랑도, 팀장 일도 모두 실패한 상수의 모습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초라하다. 출근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서 씻지도 못하고 있는 상수를 돕는 것은 경애다. 한 블록 걸어가는 일,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의 ‘무거울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경애가 있기에, 상수는 혼자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데리러 온다고요? 여기 한 블록도 안되는데 뭘 데리러 와요?

한 블럭도 사람 살다보면 한 블럭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고요.


왜 경애였고, 왜 상수였을까. 둘의 마음이 서로를 필요로 했던 이유가 뭘까. 우리는 엄마가 암에 걸려 수술대에 올랐을 때 산주 선배의 “힘내”라는 한마디에 상처받은 경애를 보고, 선배와 헤어졌을 때 자기 옆에 눕는 엄마에게서 힘을 얻는 경애를 본다. 재수를 포기했을 때 아버지가 던진 농구공에 코뼈가 부러진 상수를 보고, 경애와 손을 맞잡으며 용기를 얻는 상수를 본다.


산주의 적당한 위로와 아버지의 이기적인 분노에 경애와 상수의 마음은 없었다. 반면 경애 곁에 누운 엄마는 그저 아픔에 함께했고, 그 마음을 이어받은 경애도 그러했다. 함께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우리는 전자로부터 살아갈 용기를 얻지만, 후자로부터는 상처보다도 따가운 외로움을 느낀다. 경애와 상수의 마음은 함께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마음도 너의 마음도, 함께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들이 누운 자리에


두 소설은 개인의 아픈 마음, 아픈 기억을 치유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런데 생각해볼 만한 점은, 마음에 대한 고민이 인간과 문학이 처한 시대적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아픈 마음을 보듬지 못했으며, 죽어가는 삶들을 방치했는가. 두 소설은 아픈 마음들을 기억하고 치유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용산에서 세월호로 이어지는, 그리고 또 다른 무언가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사회적 비극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k씨가 그토록 몸서리치는 평화는, 세월호를 잊자는 주장과 닮아있지 않은가. 대통령은 세월호 대국민 담화에서 “좌절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자”고 했다. 언론은 ‘세월호 충격’으로 ‘비정상화’된 한국 경제를 논평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누군가는 선체 인양에 대해, 기억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제는 그만 묻어두자고 한다. 이들은 아픈 기억을 털어내고 ‘평화’를 찾기를 원한다.


하지만 평화는 그렇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소설은 말한다. 벗어나고, 묻어두고, 털어내는 도피적인 혹은 억압적인 행위에 평화라는 멋진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경애의 마음》에서 경애와 상수가 E(은총)를 잃은 화재를 돌이켜보자. 돈을 받기 위해 문을 잠근 사장에게 세월호 선장의 비열함이 스며 있지는 않는가. 술집에 있던 아이들이 양아치라고 폄훼당하는 소설의 설정에서, 민관유착과 비리를 일삼은 어른 대신 떠나버린 아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왜곡된 기억법이 떠오르지는 않는가. 파업 도중 성희롱을 폭로하고 스파이로 낙인찍힌 경애의 모습이 우리 사회의 미투운동과 조금은 겹쳐 보이지 않는가.


각 이슈가 ‘어떻게 정의롭게 해결될 수 있느냐’와는 별개의 문제로, 이미 지쳐버린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이 오고갔다는 사실 자체가 안타깝다. 마음이 부스러지고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슬프다. 고통에 끊임없이 다가서고, 아픈 이들에게 치유의 기적을 부여하는 한강과 김금희의 소설은 이러한 맥락에서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시사평론이기보다는 고통에 함께하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는 노동쟁의,《경애의 마음》에는 재난과 폭력이라는 사회적 비극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지만 소설은 그 해결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비극을 겪은 임선배와 경주 언니의 아픔이, 그리고 k씨의 기억이 어떻게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경애와 상수를 치유하는 마음의 힘에 주목한다. 이것은 ‘저기 있는’ 용산과 세월호의 문제가 아니다. 위축되고 좌절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우리 마음의 이야기다. 용산과 세월호를 성숙하게 기억하는 일은, k씨와 경애와 상수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독일까, 용산과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다시 읽어보자. 우리의 눈과 눈이 언제 평화를 만났는지, 경애와 상수가 언제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한 것은 기억을 묻어둔 이기적 평화도, 아픔을 털어낸 폭력적 희망도 아니다. 단지 그들 곁을 지키는 마음이다. 그리고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가 품고 있는, ‘그가 누운 자리에 나도 누워보는’ 마음이다.




한강,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예중앙, 2015

김금희,《경애의 마음》, 창작과비평, 2018

윤동주, 「병원」,《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소와다리, 2016 (초판 1948)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 2014 (초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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