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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Feb 08. 2020

안식과 치유의 기억법

박솔뫼 「그럼 무얼 부르지」, 김숨 「녹음기와 두 여자」

기억의 정치


2014년 4월 16일, 자신의 아름다움을 다 꽃피우지 못한 수많은 삶들이 떠나갔다. 누군가는 같은 학생으로서, 누군가는 아이를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으로서 가슴 아파한 국가적 재난이었다. 세월호 사건이 안전에 대한 게으른 태도가 낳은 인재(人災)였고, 어른들이 충분히 관심을 기울였다면 아이들이 떠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더욱 뼈아팠다.


게다가 사건의 책임 소재를 두고 벌어진 논쟁과 그 위에 덧씌워진 정치적 갈등은 어떻게 하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건설적인 논의를 가로막았다. 그 과정에서 떠나간 이들을 더럽히고 남은 이들의 마음을 에는 비인간적 언사가 있었고, 친구를 떠나보낸 학생들과 아이를 잃은 학부모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재난의 관리체계나 사건의 구체적 원인에 관한 ‘정치적일 수 있는’ 이야기는 뒤로하고서라도, 떠나간 영혼을 기억하고 사회적 재난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우리 사회는 무관심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 ‘피해자 이미지’ 때문에 밖에서 웃을 수 없었던 아이들, 대학 입시를 포함한 배상 문제로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서 비난당한 아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비인간적인 집단에게 국가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해도 괜찮은가.


사건을 기억하는 일은 ‘그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떠나간 이들에겐 안식을, 남은 이들에겐 치유를 제공하는 국가의 존재의미가 걸린 문제다. 그리고 세월호만의 문제도 아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부터 한국전쟁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과 용산참사에 이르기까지, 위험하고 폭력적인 한국사회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기도 하다.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와 김숨의 「녹음기와 두 여자」는 ‘기억’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적 틀을 제시함으로써 안식과 치유의 기억법을 모색한다.


앎의 기억법, 모름의 기억법


「그럼 무얼 부르지」의 서술자는 광주 사람이다.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서술자는 5.18에 대해서도, 그 정신을 이어받은 광주에 대해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나와 5.18, 나와 광주 사이에는 “내가 걷을 수 없는 장막”이 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서술자는 이와 같은 거리감을 느끼지만, 오히려 광주 밖의 사람들이 사건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버클리에 살고 있는 ‘해나’는 5.18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교토의 바에서 만난 중년 남성은 자신이 그때 살아 있던 사람이라서 광주를 안다고 말한다. 서술자는 광주는커녕 한국에도 속하지 않은 외국 사람들보다도 광주를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술자를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지 않는 무지한 인간이라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는 흔히 기억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한다. 지식이 부족한 인간은 공감이 없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는 앎의 차원에서 기억을 이해하는 앎의 기억법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고도 감히 무엇을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에 반해 서술자는 5.18을 안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기억법을 가진다. 하지만 이것은 ‘기억하지 않음’에서 오는 무지함라기보다, 오히려 ‘감히 기억한다고 말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겸손함이라고 추측해본다.


그 아픈 과거를 안다는 자만은 역사와 기억, 떠난 자와 남은 자에 대한 무례가 될 수 있기에. 5.18을 안다고 말하는 일보다, 모른다고 말하는 일이 어려울지 모른다. 역사적 비극의 슬픔에 공감하기보다, 공감하기 어려운 거리를 인정하는 일이 어려울지 모른다. 세월호를 교통사고라 정의하고 피해자가 겪은 트라우마를 혜택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그리고 사회에게는 모름의 기억법이 필요할는지도.


질서의 기억법, 존재의 기억법


한편 「녹음기와 두 여자」는 서술자인 ‘나’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구조를 취한다. ‘나’는 할머니들의 증언을 정리하여 출판하고, 그럼으로써 아픈 과거를 되살리는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할머니들의 말을 책으로 엮어내는 일은,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내용과 질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내용은 많으나 일관된 질서가 없는 ‘문 할머니’의 증언과, “다 잊어서” 내용도 없는 ‘정 할머니’의 증언은 출판할 수 없다.


겉으로는(일단 양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두 할머니의 목소리는 결말 부분에서 하나가 된다. 이처럼 대비되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은, 상이해 보이는 두 종류의 목소리는 사실 아픔을 느낀 ‘존재’라는 점에서 같았기 때문이다. 내용의 많고 적음, 질서와 무질서는 외부자적 관점일 뿐이다. 내용과 질서가 어떻든 두 할머니는 같은 사건에서 비롯된 아픔을 공유하고 있고, 그 존재로서 비극을 말하고 있다.


‘나’가 채록하려 하는 내용과 질서 중심의 증언은, 할머니의 아픔과 존재에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고 외부자적 관점을 취하는 질서의 기억법이다. ‘나’는 ‘사람들’이 읽기 쉬운 기록을 남기는 데에 치중한 나머지 존재의 기억을 대상화하여 질서를 부여했고, 진정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다.


문 할머니에게는 문 할머니라는 존재가 기억하는 방식이 있고, 정 할머니에게도 그 존재가 기억하는 방식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경험과 유기적으로, 혹은 혼란스럽게 이어 붙이고 또 떼어서 기억하는 문 할머니가 있고, 또 잊음과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그 잊음과 침묵에 기억이 서려 있는 정 할머니가 있다. 이러한 존재의 기억법을 존중하지 못했기에, 나는 할머니들과의 소통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나’가 두 할머니의 목소리를 겹쳐 듣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면서, 소설은 존재의 기억법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모든 인간에게는 각 존재의 존재방식에 부합하는 기억법이 있다. 존재의 기억법을 무시하고 그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순간, 존재를 억압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선량한 피해자’로 남기 위해 웃지 못하는 세월호 학생을 치유할 것은 존재의 기억법을 학습한 사회리라. 성노예의 수치심과, 수많은 가족과 이웃이 학살당하는 참담함을 증명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도.



그렇다면 우리는 앎과 질서의 기억법을 폐기하고, 모름과 존재의 기억법으로 나아가야 할까. 필자는 글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읽히지는 않기를 희망한다. 더 학습하여 아픔 가까이에 다가가고자 하는 해나와 일본 중년의 노력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공식적인 자료로 재구성하려는 채록자의 도전도, 그 가치를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이분법적 잣대로써 그들을 깎아내리는 일은 오히려 더 큰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학습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보편적' 역사 너머에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두 소설은 보여준다. 우리가 배워 온 역사 반대편에는, 우리가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역사도 존재한다. 수치화하고 언어화하는 역사 반대편에는, 수치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한 인간이 증명하는 역사도 존재한다.


우리는 앎을 추구하되 모름을 인정할 수 있는가.

존재와 화해한 질서를 모색할 수 있는가.

그리고 안식과 치유를 제공할 수 있는가.




박솔뫼,《그럼 무얼 무르지》, 자음과모음, 2014, 137~168쪽

김숨, 「녹음기와 두 여자」,《21세기문학》, 21세기문학, 2016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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