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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Mar 07. 2020

서사에 관하여 <1>

윤이형《작은마음동호회》

서사


말을 하고 글을 쓰다 보면 왠지 모르게 애착이 가는 단어가 몇 개씩은 생긴다. 필자는 ‘서사’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문학적이고 깊이 있어 보여서 끌렸는데, 윤이형의 단편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사란 무엇인지, 서사에는 어떤 힘이 있는지. 내 질문은 서사 만들기를 업으로 삼는 소설가 또한 마주하는 문제의식이 아니었을까.


첫 번째 소설은 「작은마음동호회」다. 소설의 주인공은 본래 이름 석 자보다 OO맘이라고 불리는 편이 익숙한 ‘아줌마’들이다. 이들은 작은마음동호회를 결성하여 처음으로 자신의 지적, 정치적 욕구를 위해 힘을 모은다. 중요한 지점은 자신의’ 욕구다.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본질대로 살아오지 못했다. 대신 사회가 ‘아줌마’들에게 요구하는 역할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해왔다. 스스로의 존재조차 외부에서 주어지는 상황은 인물들의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이들은 본래 이름 석 자를 되찾고서도 자신을 위한 서사를 구성하지 못한다. 아이를 위한, 남편을 위한, 시어머니를 위한 서사에서 맴돈다. 서사에서조차 배제당한, 아니 서사에서 배제당함으로써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설은 해방의 손길을 내민다. 자신을 위한 서사를 만들라고.


“그랬더니 강서빈 작가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고 읽어보세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이기적이 되세요, 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주 부드럽게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작가님의 조언으로 인물들은 주체적인 서사를 되찾는다. 여기서 서사는 단지 발생한 사실의 나열로서의 서사가 아니다. 현실 세계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과정과, 주체적 사유로써 서사적 세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배제하고는 서사의 의미를 말할 수 없다. 자신을 위한 서사를 쓴다는 말은 즉, 그 해석과 창조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게 된다는 의미다.


서사에는 사실의 기록을 넘어 인간의 존재와 사유를 표현하는 힘이 있다. 이 세계의 작은 마음들이 스스로를 위한 서사를 써내려가기를,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소설은 간절하게 희망한다.


평화로운 서사


모두가 자신을 위한 서사를 갖는 것이 윤이형의 바람이라면, 적어도 누군가의 서사를 빼앗지는 않는 것이 소설가된 윤리이리라. 구병모 소설가가 “피로 쓴 문장”이라고 묘사할 만큼, 윤이형은 누구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도록 각 인물의 서사에 귀기울인다.


「승혜와 미오」는 제목 그대로 승혜의 서사와 미오의 서사다. 승혜와 미오는 서로 사랑하는 레즈비언이다. 동성애자의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전작 「루카」*(하단 링크 참조)가 떠오르기도 한다.


게이인 딸기와 루카가 동성애자임에도, 둘 사이에는 ‘동성애자’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는 포섭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 「루카」의 주된 문제의식이었다. 「루카」는 동성애 서사가 제시하는 인식의 틀이 딸기와 루카의 서사를 억압하지는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딸기가 게이로서의 루카와 기독교인으로서의 예성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호명한 결말은, 두 정체성이 화해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질문한다. 이 질문은 바꿔 말하면, 외부에서 주어지는 서사적 질서(동성애 서사의 질서)로부터 루카의 서사를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승혜와 미오」도 동일선상에서 읽어볼 수 있다. 동성애라는 소재가 제시하는 서사적 질서로부터 승혜와 미오의 서사를 해방시키려는 시도다. 승혜와 미오는 레즈비언이지만, 성적 지향 밖에도 수많은 정체성과 서사를 지닌다.


승혜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저지르고 집을 나왔고, 승혜를 길러준 어머니는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의 보호 없이 자란 승혜는 ‘완전한’ 가족을 향한 욕망을 가지고, 아이를 키우기를 원해 베이비시터 일을 한다.


반면 미오는 유복한 가정에서 단단한 인간으로 성장했으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가족과 연을 끊는다. 주체적으로 인간관계를 설정하는 미오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 가족 이미지에 거부감을 느껴 승혜와 충돌한다.


같은 동성애자지만, 딸기와 루카가 그러했듯 승혜와 미오도 전혀 다른 인간이다. 그래서 승혜와 미오도 다툰다. 승혜는 엄마에게 미오의 존재를 숨기고, 미오는 승혜가 돌보는 아이에게 승혜를 아우팅하면서 둘의 갈등은 표면화된다.


‘너는 몰라.’라는 미오의 한 마디는 승혜의 마음을 마구 뒤흔든다. 승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딸기와 루카가 그랬듯이, 승혜와 미오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 소설은 전작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되살린다. 현실의 퀴어를 ‘퀴어 서사’의 틀 안에 가두지 않고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지만 「루카」는 아직 딸기와 루카의 이야기를 행복하게 매듭지을 수 없었다. 딸기가 떠나보낸 루카를 기억하며 그의 두 이름을 부르는 결말이 창작 당시의 최선이었으리라.


해방된 퀴어 서사와 따뜻한 연대감은 양립할 수 있을까. 아마 오랫동안 사유를 벼려냈으리라. 그 결과 「승혜와 미오」에서 작가는 하나의 산뜻한 매듭을 완성한다. 여기에서 승혜가 돌보는 아이의 엄마가 등장한다. 승혜의 성 정체성을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몰라도 괜찮다고,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된다고. 그런 거였다.


엄마도 모르겠어, 엄마가 좋은 엄만지 나쁜 엄만지. 엄마는 그냥 엄마지. 회사에서 늦게 오지만 그래도 엄마지. 마찬가지야. 세상에는 다른 누나랑 사랑해서 같이 사는 누나도 있는 거야. 그냥 원래 그런거야. 그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모르겠어.
그래, 엄마도 모르겠어. 모르는 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거야. 알았지?
응.
(중략)
알 수가 없었지만, 더 이상 무섭지는 않았다. 미오가, 많이 보고 싶었다.


레즈비언임에도 아이를 원하는 승혜는 좋은가 나쁜가, 가족제도를 거부하는 미오는 옳은가 그른가. 소설은 답한다. 우리는 모른다고, 아마 그건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거라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승혜의 이야기, 미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되는 거다.


몰라도 괜찮다는 아이 엄마의 말은, 승혜와 미오뿐 아니라 모름으로 좌절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전하려던 위로가 아니었을까. 누구의 서사도 누구의 존재도 파괴하지 않는 평화로운 서사그것은 다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고모름을 인정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충돌하는 서사


이렇게 평화로운 서사들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은 않다. 세상 모두가 작은마음동호회원들처럼, 승혜와 미오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너무 첨예하게 맞부딪쳐서 화해의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갈등은 실제로 삶에 편재해 있다. 이를 외면하고 갈등의 서사를 다룬다면 그것은 문학적 이상주의일 뿐이리라.


그래서 「피클」은 두렵더라도 그런 갈등과 대면한다. 주인공 ‘선우’는 오이다. 다들 통 속의 피클로 그럭저럭 살아가는데, 나 혼자 괜히 불편해하고 신경을 기울이는, 그런 오이다. 의심스러운 세계에 순응하지 않고, 남들은 모두 피클이어도 나 하나는 오이로 남기 위해 애쓴다.


오이로 살기는 쉽지 않다. 다들 식초의 삼투압 작용에 몸을 맡기는데, 나 하나는 빳빳하게 서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피클들로부터 못마땅한 시선을 받기도 일쑤다. 그런데 정말 난해한 질문은, 오이로 사는 게 맞느냐 하는 것이다.


피클은 틀리고 내가 맞다고 할 수 있나? 좋은 피클도 나쁜 오이도 있는 것 같은데, 사이좋은 피클들 사이에 괜한 오이 하나 껴있는 것 같은데. 오이는, 선우는 고뇌한다.


선우의 고민은 전 직장동료인 ‘유정’에게서 온 편지를 계기로 표면화된다. 편지에는 편집장이 유정을 성폭행했다고 적혀있다. 유정과 편집장은 가까운 사이였고, 그 만남에서 성폭행이 있었다고 유정은 주장한다.


선우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비롯한 페미니즘의 서사를 인지하고 있지만, 쉽게 유정의 편에 서지는 못한다. 유정과 편집장이 사귀었고, 유정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는 직장 동료들의 진술을 들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유정을 믿고 싶지만, 유정과 대척점에 있는 단단한 서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우연한 만남’에서 ‘자연스러운 친밀감’, ‘위로와 경제적 도움’으로 이어지는 가해자의 서사와, ‘의도적인 접근’에서 ‘거짓말’과 ‘협박’으로 귀결되는 피해자의 서사 사이에서 선우는 길을 잃는다.


여기에는 작은마음동호회의 연대도, 승혜와 미오의 사랑도 없다. 이곳은 서사들이 부대끼며 어느 한쪽이 나가떨어질 때까지 서로를 내몰아가는 언어의 전쟁터다. 선우는,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양쪽을 지키고, 누구도 죽지 않는 서사를 쓸 수는 없을까.


“당신이 그애를 믿는다면.” 평소에 선우와 자주 충돌하던 남편이 해준 말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유정과 편집장 중 누가 옳은지는 애초부터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믿는 일뿐이다.


믿을 힘조차 없는 이들에게 소설이 전하는 말이다. 믿는 대로 가라고. 선우도 그랬다. 십이 년 전 편집장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그때는 믿을 힘이 없었다. 싸우고 싶지만 두려웠고, 누군가를 믿고 싶지만 혼자였다. 하지만 유정과 남편의 신뢰를 느끼면서, 선우는 믿을 힘을 얻는다. 자신이, 유정이 조금이나마 믿고 싶어진다.


나아가 선우는 이러한 건곤일척의 진실투쟁을 멈추고, 모두가 책임이라는 단어에 연루되는 가능성을 떠올려본다. 어느 한쪽을 선, 다른 한쪽을 악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모두가 각자의 몫을 떠안는 세계는 불가능할까. 둘의 관계가 잘못 흐르기 전에 말리지 않았던 누군가, 뒤에서 수근대던 누군가, 유정의 이야기를 외면했던 누군가가, 각자의 책임을 인정할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 짧고 뜨거웠던 정의감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해고, 퇴사, 명예훼손, 무고, 고소, 병원비, 리볼빙, 연체...... 같은 말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모두의 일이었다면 떠올리지 않아도 좋았을 말들. 선이나 악 대신에 책임이라는 단어에 모두가 조금씩 연루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단어를 나눠 가졌더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을 말들이었다. 그 차갑고 선명한 단어들이 차례로 머리를 후려쳤다. 후련했다.


폭력과 저항, 혐오와 두려움의 현장에서 소설은 책임을 호출한다. 두 개의 서사가 생명을 내걸고 치르는 전투를 방관하는 모두가 각자의 책임을 느낀다면. 모두가 나눠가진 책임은, 그렇게 쓰인 새로운 서사는, 두 존재 두 서사의 전투가 남긴 핏자국을 하이얀 눈처럼 덮어줄 것이다. 누구의 존재도 해치지 않는 서사는, 모두가 책임에 연루될 때만이 가능하다. 윤이형의 서사는 이렇게 존재를 지켜낸다.


서두에 꺼냈던 사소한 이야기를 이어보겠다. 서사라는 단어는 왜 나를 끌어당길까? 서사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윤이형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쓴다. 서사에는 한 인간의 존재와 의식을 담아내는 강력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윤이형은 서사를 쓰는 동시에 존재를 기록했다우리는 서사를 읽는 동시에 존재를 마주한다.



*윤이형의 전작, 「루카」에 관하여 https://brunch.co.kr/@jiheon0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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