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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Mar 07. 2020

서사에 관하여 <2>

윤이형《작은마음동호회》

서사, 가장 진실한 순간


이처럼 윤이형의 소설은 우리가 구성하는 서사에 우리의 경험과 사유와 감각, 다시 말해 총체적인 삶이 새겨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존재를 담아내는 힘이 서사에 있다고 할 때, 윤이형이 이제부터 보여주는 것은 그 힘과 윤이형 자신의 문학적 실천에 관한 사유다. 서사의 힘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언제 빛을 얻고 잃는가. 서사를 쓴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가.


‘서사의 힘’에 대한 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좋은 소설’에 관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의견을 인용해보겠다.

좋은 소설은 늘 현실보다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더 느리거나 빠르다.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신형철이 말하는 좋은 소설이다. (좋은)소설은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현실과 다르기에, 사회학이나 정치학으로 온전히 포섭되지 않는 고유한 세계를 창조한다.


문학이나 사회학이나 쉽게 정의할 수는 없는 개념이지만, 필자는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사회학(그리고 정치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학적 세계는, 역설적으로 대단히 사회학적이다. 소설과 현실 사이의 ‘문학적 긴장’은, 소설을 현실과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실 자체를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은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창조했지만,《동물농장》의 비판적 상상을 공유하기 전과 후의 세계는 다르다고도 필자는 믿는다.


사회학이 ‘현실적인’ 테두리 안에서 문제해결을 도모한다면, 문학은 그 테두리를 늘이며 줄이고 넘나들어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문학은 꿈꾸고 상상함으로써 문학적으로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세계를 변혁한다.


그러므로 신형철이 말한 문학의 ‘비사회학적인’ 면모는, 생각해 보면 사회학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문학은 사회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학적일 뿐이다.


어쨌거나 신형철은 현실 자체를 문자화하는 일은 서사의 아주 미약한 기능에 지나지 않으며, 서사의 힘은 오히려 현실과 긴장할 때 발생한다는 역설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서사가 지닌 역설이라는 맥락에서 「님프들」을 읽으면 서사의 힘을 탐색하는 윤이형의 사유에 동행할 수 있다.


「님프들」은 서술자인 ‘민’이 ‘준’을 생각하는 소설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소설 속에 준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몸이 약한 여인과 결혼해 민을 낳은 인물도, 중학생 때 민에게 편지를 쓴 인물도, 항상 민을 지켜주는 친구도, 대학생 때 사랑하고 이별한 인물도 모두 준이다.


이는 마치 민이 마주친 ‘힐라스와 님프들’이라는 그림 같다. 힐라스라는 그리스신화 속 인물이 똑같이 생긴 일곱 명의 님프들과 함께 있는 장면을 담는 그림.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님프들>

그림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소설의 국면은 전환된다. 병렬적으로 나열했던 준에 대한 기억들은 서로 뒤섞이고, 민은 마침내 하나의 기억에 도달한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아들 준. 준의 기억, 그리고 준을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낸 민은, 자신이 그 기억들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애달픈 현실을 깨닫는다.


나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었다. 노력은 했지만, 매일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준이 죽었다. 매일 다른 방식으로, 준은 자꾸만 죽었고, 그러면 나는 다음날 오후 네시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나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민이 사랑하는 모든 인간이 준이며, 그 준들의 반복되는 죽음이 민을 괴롭히는 소설의 상황은 비현실적이다. 아마 작가가 ‘현실 자체’를 그리려 했다면, 「님프들」의 지면에는 다양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했으며, 결정적으로 최근에 자신의 아이를 잃고 정신착란을 겪는 ‘민’의 이야기가 건조하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최선인가. 누군가의 삶과 고통을 기억하는 일을 그토록 단순한 기록으로 환원해도 괜찮은가. 지금까지도 아들의 표정과 몸짓과 언어 하나하나가 눈과 귀에서 쟁쟁히 울려 퍼지는 민의 삶을, 자음과 모음의 배열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가.


그래서 소설은 담아내지 않는 편을 택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난 아들과 어떤 세월을 보냈고 어떻게 떠나보냈는지를 쓰지 않는다. 민의 흘러넘치는 아픔을 반듯한 문자열 안에 가두지 않는다. 대신 민이 사랑하는 모든 인간들이 준이 된 환각의 세계에 주목한다.


현실의 대척점에 있는 환각의 세계 한가운데서작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슬픔을 포착한다.


‘현실과의 긴장’을 통해 문학적 진실에 도달한 「님프들」은 ‘정말 좋은 소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긴장과 정확히 맞닿아 있는, 작은 존재를 들여다보는 소설의 촉촉한 상상력, 이를 두고 사회학적이지 않다 말하기는 어려우리라.


이제 앞서 언급한 서사의 역설에 비추어 소설을 한 꺼풀 벗겨보자. 「님프들」은 현실이 아니라 환각을 묘사함으로써 민의 아픔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감각으로 드러낸다. 현실 자체를 기록하는 대신 현실과 긴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소설은 현실의 고통이 지닌 두께와 질감을 무엇보다 섬세하게 표현해내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소설을 민의 정신착란 증세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기억하고 문학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서사는 문자 너머의 무언가, 「님프들」을 전자인 동시에 후자로 이해시키는 무언가를 내포한다.


민이 처한 현실 대신 민이 경험한 환각을 서술하는 일이 더 진실한 서사를 만들어내는 서사의 역설을 이해한 순간, 우리는 문자를 인식하는 시각적 작용 너머에 있는 서사의 본모습을 희끄무레하게나마 목격한다.


‘민이 아팠다’라고 서술해서 그의 아픔을 담아내기에 서사는 너무 힘이 부족하다. 하지만 「님프들」이 보여주었듯이, 서사는 다른 무엇보다도 진실하게 아픔을 담아내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윤이형은 서사의 힘없음과 힘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서사의 힘을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딪친다. 평평한 문자에 유려한 치장을 덧붙이는 대신, 문자 너머의 드넓은 세계를 풍요롭게 채우기 위하여 있는 힘껏 상상한다.


서사를 지키는 법


「님프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재현 방식은 우리에게 서사에 존재하는 강력한 힘을 증명한다. 서사는 어떤 경우에는 전형적이고 남루한 문자의 나열이 되기도 하지만, 존재의 가장 진실한 면모를 포착할 가능성을 언제든 지니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서사의 구성 자체에 관한 질문을 얻는다. 쉽게 쓰인 서사는 진실을 억압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사의 힘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서사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 슬프게도 그것은 세계다. 가장 진실한가장 따뜻한 서사조차 굴절되고 산란되어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어떤 공감은 누군가를 한없이 외롭게 만들고, 어떤 치유는 누군가의 염증이 된다.


더욱이, 그 서사가 세계의 질서와 대립한다면 검열의 문제도 개입한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자의 또는 타의에 의한 검열로부터 서사는 자유로울 수 없다나에게는 쓸 자격이 있는지, 능력이 있는지 끊임없이 되묻게 한다.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인가는 말하고 쓸 수 있는 걸까. 「하줄라프」는 서사의 힘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세계를 의심하고, 그 세계 속에서 쓴다는 행위의 의미를 질문한다.


「하줄라프」는 「의심하는 용」과 「용기사의 자격」 두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인 「의심하는 용」은 용들이 사는 세계인 하줄라프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용은 두 가지 삶의 방식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하나는 용기사에게 선택받아 사악한 마법에 맞서 싸우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용기사에게 선택받지 못해 하줄라프에 남아 새끼를 낳는 삶이다.


주인공인 ‘갈’은 특이하게도 용기사와 접촉했지만 선택받지는 못한다. 그 결과 자신과 교감한 인간의 기억을 전해 받은 갈은 전투하지도 번식하지도 못하는, ‘의심하는 용’으로 자란다. 무엇이 용들을 싸우고 죽게 만드는지, 사악한 마법의 존재는 무엇인지 갈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외로웠던 갈은 어느 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의심하는 용인 ‘이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갈과 이파는 모두 암컷이라 번식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생각하고 말하면서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편 의심할 뿐 아니라 창조하는 용이었던 이파는 친구인 인간 소녀들을 위해 ‘팔루자’라는 세계를 상상한다.


앞서 말한 ‘현실과의 긴장’의 연장선상에서, 이파가 창조한 서사는 자신과 소녀들에게 평화를 제공하는 좋은 서사다. 하지만 잔인한 세계는 그 힘을 파괴하고 왜곡한다. 갈은 지금까지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이파가 인간을 위해 상상하자 소외감을 느낀다.


이렇게 세계는 이파가 가진 밝은 상상력마저 갈의 쓰라린 고독으로 변모시키고, 결국 번식기가 된 갈은 폭주하고 소녀들의 창에 찔리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갈의 죽음은 서사의 해방적인 힘을 왜곡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서사를 써나가야 하는지 하는 과제를 남긴 채 2편으로 이어진다.


「용기사의 자격」에서 소설은 이파가 떠올린 ‘팔루자’라는 이라크의 지명을 통해 현실 공간으로 되돌아온다. 하줄라프(Hajullaf)와 팔루자(Fallujah)는 일종의 평행세계 관계였던 셈이다. 2편에서는 하줄라프의 진실이 드러나는데, 하줄라프는 자식을 IS로 보낸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꿈과 환각의 세계였다.


주인공 ‘엘렌’은 그 환각을 책으로 엮어내는 일을 했었다. 그러나 IS가 궤멸된 이후, 이야기를 제공했던 부모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이야기를 빼달라고 부탁했고, 엘렌의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간다. ‘진부하고 처참한’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부모’라는 잔인한 이름을 부여하는 현실 세계가 이들을 덮치고, 이별의 고통과 부모로서의 죄악감을 치유하는 하줄라프는 닳아 없어진다. 그렇게 이들은 더 이상 하줄라프를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엘렌은 부모들 중 하나인 ‘카미유’와 갈등하고, 부모들의 고통에 완전히 다가설 수 없는 한계에 좌절한다.


세계의 사나운 풍화작용은 부모들의 서사를 파괴하고그 서사를 수집하던 엘렌의 선의마저 왜곡한다. 서사의 박탈과 갈의 고통이라는 하줄라프의 결말은 팔루자에서 고스란히 재생된다. 이파의 서사도, 엘렌과 부모들의 서사도 힘을 잃고 소멸해간다.


엘렌을 치유하고 서사의 힘을 되살린 것은 꿈속의 한 장면이다. 꿈에서 엘렌은 알을 발견하고 두 손바닥으로 접촉해보지만,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여겨 알을 선택하지 못한다. 엘렌은 꿈을 떠올리고 카미유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다. 그 마음에서 힘을 얻은 엘렌은 카미유에게 편지를 적어나가며 소설은 끝이 난다.


꿈은 엘렌이 갈과 접촉한 인간임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은 엘렌도 하줄라프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일지 모른다. 엘렌의 꿈은 부모들에 대한 공감을 보증하지도, 하줄라프를 이야기할 자격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다만, 꿈은 엘렌이 카미유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상한다. 부모들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도 하줄라프의 꿈을 꾼 것은 엘렌이 얼마나 강렬하게 슬프고 아팠는지 보여준다.


엘렌이 꿈을 꾼 후 카미유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카미유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있기에, 설령 완벽하고 확실하지 않더라도, 엘렌은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간다.


엘렌이 편지를 쓰는 행위는 공감과 자격의 문제가 아니다. 타인에게 공감한다고 주장하고 자신이 발언할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는 일은 오만하고 위험하다. 엘렌이, 윤이형이 글을 쓰는 것은 그저 타인을 위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글과 좋은 서사를 지킨다는 이상을 붙들기조차 버거운, 무엇도 확신할 수 없고 또 떳떳하기도 어려운 세계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뿐이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은 어디까지 순수해져야 하고 또 순수해질 수 있을까? 내가 정말로 그들을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카미유를 잃어버린 일로 왜 이렇게 가슴이 쓰라린 것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진짜 친구였기 때문이지, 엘렌은 생각했다. 세상 모두가 발톱을 들이밀며 공격해온다 해도 그 진실을 내줄 순 없었다.

보낼지 안 보낼지는 그다음에 생각하자. 이미 어딘가로 이사를 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상관 없었다. 엘렌은 쓰고 싶은 한 문장 한 문장을 천천히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이상한 도시의 이상한 식당에서, 손바닥 위의 용 알처럼 이상하게 따스한 저녁이 지나가고 있었다.

또 처음의 이야기. 서사는 힘이 세다. 우리 삶의 가장 진실한 순간을 전한다. 그래서 서사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서사는 약하다. 춥고 험난한 세계는 서사의 불빛을 쉽게 꺼트린다. 그래서 우리는 서사를 지켜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



윤이형,《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


참고

윤이형, 「루카」,《제5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5

신형철,《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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