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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Mar 29. 2020

객관적이지 않은 의학을 생각하며 <1>

김승섭《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필자는 망설임 없이 이 사람의 이름을 댄다. 자칭 사회역학자이며 필자는 의료사회학자라고 부르곤 하는 김승섭은,《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질병이 사실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아픔과 건강의 불평등한 분배에 관한 출판물이 적지 않았음에도 김승섭의 책이 남다른 호소력을 지녔던 것은*, 우리 사회의 의사로서 그가 가진 따뜻한 시선이 독자에게 잘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우아한 이론을 가져와도 혐오는 혐오이고, 어떤 낙인을 갖다 붙여도 사랑은 사랑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혐오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저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분명 그럴 거라고 저는 믿어요.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여러 훌륭한 문장 가운데서도 이 구절은 특히 큰 울림을 준다. 세계가 가하는 폭력을 마주친 적이 있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외치는 비명소리에 귀기울여본 적이 있다면,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면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김승섭은 말한다. 쏟아지는 비를 멈출 수 없다면, 함께 맞아야 한다고. 명료한 통계와 건실한 과학이 뒷받침하는 그의 따뜻한 사유는, 아직 갈 길이 먼 사회학도로서 본받고 싶어질 뿐이다.


김승섭과 그의 책에 대한 찬탄은 이쯤하기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책을 펼쳐보자. 사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부제로 달고 있는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라는 구절에 맞게,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의학적 보건학적 통계는 ‘질병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하나의 주장을 향해 수렴한다. 지금 쓰는 글의 목적은 그 너머에 있으므로,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만 짚어보자.



#불평등한 여름, 국가의 역할을 묻다


여기서는 1995년 여름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염재난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다. 1995년에 폭염으로 사망한 사람은 그 이전 십여 년을 합친 수보다 많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상식적인 설명은 그 해의 기온이다. 당해 7월 13일 기준 섭씨 41도, 체감온도 48도에 달할 정도로 1995년 시카고의 여름은 무더웠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질문을 바꾼다. 왜 우리는 폭염이 사람들을 위협하도록 내버려두었는가? 어느 수준의 기온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느냐가 아니라, 그에 앞서 어떤 조건에서 폭염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을 바꿈으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죽고, 누가 폭염에 취약한지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한 연구에 의하면, 사회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사회활동에 참여한 사람보다 많이 죽었다. 폭염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조건은, ‘사회적 고립’이었던 셈이다.


두 번째 연구는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진 론데일 남부와 북부에서 발생한 사망자 차이에 주목한다. 여기서 핵심 요인은 사회적 연결망이었다. 불안한 치안으로 주민들이 외출을 꺼리던 론데일 북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남부보다 10배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회적 연결망과 그 부재(사회적 고립)가 사망자 수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지한 시카고는, 끊어진 연결망을 복원함으로써 4년 후 다시 찾아온 폭염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시카고의 비극적인 여름은 폭염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폭염이 비극을 불러오도록 방치한 사회의 책임이었을까.


#위험한 일터는 가난한 마을을 향한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무엇이 부족했나 꼼꼼하게 반성한 시카고의 사례는 모범적이다. 하지만 지금 볼 것은 모범적이지 않은, 아니 오히려 한편 억울하고 한편 수치스러운, 우리 사회의 이야기다.


1962년 김종필과 오히라를 통해 이루어진 한일 회담에서, 일본이 한국에 3억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양국은 외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그와 함께 당시에 ‘인조 실크’라 불리던 레이온 직조 기계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다.


레이온이 나일론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으며, 레이온 직조 공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에 중독되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 결국 일본은 경제 원조를 명분으로 이 애물단지를 손쉽게 처분한 셈이다.


한국에 넘어온 레이온 기계는 국가경제의 발전에는 밑거름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레이온이 배출한 이황화탄소는 900명이 넘는 노동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레이온 기계를 인수받은 원진레이온은 그렇게 직업병 문제로 도산하고, 1994년 레이온 기계는 이번엔 중국으로 팔려간다.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기계는, 지금 북한에서 가동 중이라 한다.


여기서도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국경을 불문하고 셀 수 없는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한 것은 이황화탄소라는 화학물질일까, 아니면 레이온 기계를 내리물림한 공장과 불안한 눈으로 이를 지켜본 국가들일까.


#제도가 존재를 부정할 때, 몸은 아프다


의 두 사례가 시카고 폭염과 원진 레이온이라는 구체적 사건에서 출발했다면, 여기서는 추상적인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존재를 부정하는 제도는 우리를 아프게 할까? 김승섭은 2015년 동성결혼 합헌판결이 있기 전 미국의 동성 커플을 연구한 자료를 소개한다.


연방대법원의 합헌판결 이전까지 이들은 커플로서의 존재를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다. 동성결혼이 여전히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그런 법은 없었다는 편리한 논리로써 누군가의 존재는 간단하게 지워진다.


연구자들은 그 지워진 존재들의 통증을 진찰했다. 2008년 캘리포니아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다가 5개월 후 다시 금지된다. 연구는 이 짧은 기간 사이에 결혼을 인정받은 동성애자를 표본으로 삼아 정신건강을 분석했다.


그 결과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 결혼을 인정받았을 때는 유사한 정신건강을 보였지만, 결혼을 인정받지 못한 동성애자의 정신은 그들에 비해 유의미하게 불건강했다.


한편 그보다도 적극적으로 동성애자를 배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2004년과 2005년에는 동성결혼 금지를 법제화하는 움직임이 미국 전역에서 발생했다. 연구는 그 움직임이 동성애자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 결과, 이번에도 동성결혼 금지가 법제화된 주의 동성애자들이 더 많은 불안장애와 정동장애를 겪었다.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고 심지어 금지가 법제화되었던 주에서 동성애자가 겪었던 우울증에 대해, 의학은 ‘동성결혼 법제화’라는 처방을 내릴 수 있었을까. 제도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느끼는 아픔을 진단할 때, 의학은 이 사회의 제도적 결함을 비판할 수 있을까.



*김명희, 「지식 전환의 새로운 방식 :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2017), 우리 몸이 세계라면(동아시아, 2018)」, 경제와사회, 2019, 278-28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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