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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Mar 29. 2020

객관적이지 않은 의학을 생각하며 <2>

푸코의 질문

질문 바꾸기


김승섭은 의학이 통상 그러하듯이 신체적 통증을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아프게 하고 그 아픔을 방치한 사회구조적 원인을 규명한다. 우리의 아픔을 이해할 때, ‘사회역학’의 측면에서 아픔의 원인을 찾는 일은 조직과 세포를 들여다보는 일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대단히 새로운 서사는 아니다.


세계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아프게 할 땐 말할 필요도 없고, 제도가 우리를 아프게 방치할 때도 우리는 아프다. 우리의 직관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다. 또 의식주, 과학기술, 지식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불평등하게 나누어지는 지금의 사회에서(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안전과 의료가 불평등하게 나눠지는 상황도 대단히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볼 만한 점은, 우리가 (의학적인) 아픔을 어떤 언어로 다루느냐 하는 점이다. 가령 ‘암’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왜 암에 걸리는가?


삼성서울병원에서 제시하는 짤막한 설명을 보자.

학문적으로 말하면, 정상세포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게 되고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암에 걸리게 됩니다. 암 발생의 위험요인으로 알려져 있는 흡연, 발암성 물질, 발암성 병원체 등에 정상세포가 노출되면 유전자의 변이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유전자 변이가 수 년에 걸쳐 축적되면 암이 발생하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자가 암 발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만, 암 발생은 대부분 유전되지 않는 후천적 요인, 즉 흡연이나 특정 음식의 섭취, 활동적인 생활 양식과 같은 행동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후략)*


인용한 글에서는 암의 발생 원인을 ‘정상세포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해 증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암에 걸린 신체의 조직과 세포를 검사해보니, 암의 원인은 유전자의 돌연변이였다는 뜻이다.


삼성서울병원의 글은 조직과 세포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검증된 암 해설일 것이다. 하지만 ‘조직과 세포에 관한 한’에서만 그렇다.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볼 수 있다. 왜 조직과 세포를 검사하게 되었을까? 암을 앓는 인간의 가정환경은 윤택했는지, 직장생활과 인간관계는 원만했는지, 경제적 형편은 괜찮았는지는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발암물질에 정상세포가 노출되면 암이 발병한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연구까지는 ‘의학’의 영역이고, 그 물질을 막지 않는 기업과 법률을 연구하고 비판하는 일은 ‘사회역학’의 손으로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에서 주장하듯이, 질병을 일으키고 방치한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일이 세포와 조직을 해부하는 일만큼 유효한 의미를 갖는데도 말이다.


불평등한 폭염을 내버려둔 사회 대신 뜨거운 여름만을 기록한 언론에게,

노동자를 이황화탄소에 중독시킨 기업에는 눈감고 노동자에 ‘의학적’ 유해성을 증명하라 요구한 법률에게,

성소수자를 우울하게 만든 배타적 문화가 아니라 생물학적 인간의 정신질환을 진단하는 의료 시스템에게,

우리는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사회역학의 언어는 의학이 될 수 없는가.


‘객관적 의학’의 역사


김승섭은 낸시 크리거 교수의 논문을 소개하면서, 질병의 원인을 분자생물학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게 한 현대 의학의 과거를 파고든다.


현대 의학을 지금의 형태로 만든 첫 번째 원인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이다. 질병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분자생물학의 언어가 보건학이나 사회학의 언어에 비해 날카로웠기 때문에, 현대 의학은 분자생물학의 해설을 채택한다.


그렇지만 그만큼 중요한 두 번째 원인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인간의 몸에 관한 사회구조적 연구는 자칫하면 공산주의자라는 오해를 사기 좋았고, 갈수록 빠르게 진보하는 분자생물학 분야에 뒤처지게 된다. 분자생물학의 발전에는 힘을 실어주고 반대로 사회역학의 발전은 위축시킨 것은 이데올로기였다.


이처럼 권력이 만들어낸 학문적 지평은 사회역학을 의학의 영역 밖으로 밀어냈고, 그 결과 의학에는 ‘한 개인’의 정신과 신체를 물질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자칭 ‘객관적 의학’만이 남게 되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논하는 ‘역학 논쟁’이 1990년대에 다시 불붙었다고 책은 설명하지만, 위의 분석은 의학의 의미를 여전히 조직과 세포에 관한 이론으로 국한시키는 오늘날의 이해에도 들어맞는다.


사회구조를 바라보는 시각을 자연스럽게 ‘객관적 의학’ 바깥으로 치워버리는 오늘날의 사고방식은 이데올로기가 구성한 것인 동시에, 그 사고방식 자체도 이데올로기다.


푸코의 질문


정리하자면 질병은 사회적이라는 통찰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은, 왜 질병을 사회학이 아닌 생물학의 언어만으로 사유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김승섭도 필자도 질병이 생물학적인지 사회학적인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분석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도 아니다.


질병을 사회학이 아닌 생물학의 관점에서, 생물학의 언어로 기술하게 된 역사적 배경. 이것이 질문의 요지다. 그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객관적’ 의학이 사실은 얼마나 다양한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뒤엉켜 탄생한 것인지를 확인한다.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광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본다면, 그 순간 우리가 광기라고 가정한 어떤 관념에 기초해 질서를 부여한 서로 다른 사건과 실천에 대해 어떤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푸코는 광기와 같은 보편적 개념이 범하는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개념을 만들어낸 권력을 드러내기 위해 질문한다. 분자생물학의 권력을 드러내는 일도 마찬가지의 출발점에 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질병이 조직과 세포의 작용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본다면, 우리가 조직과 세포를 중심으로 질서를 부여해 온 질병들을 어떤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쯤하면 질병이 조직과 세포 때문에 발생하지 무슨 소리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심의 여지는 있다.


작업장에서 배출하는 유해물질로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는 왜 질병에 걸렸을까. 유해물질의 화학작용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도, 위험성을 외면한 기업과 국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처방은 단지 유해물질의 생리적 효과를 막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유해물질을 방치한 기업과 법률을 손보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아픈 노동자에게 적절한 처방을 제시하였느냐 물으면, 반올림의 기나긴 투쟁이 떠오를 따름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앓았던 백혈병의 원인으로 유해물질의 복잡한 화학작용을 규명할 필요가 없었다면, 사회역학이 분자생물학만큼 ‘의학’이었다면, 그래서 사회역학의 방법만으로도 그들의 아픔이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상상하게 된다. 푸코의 질문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정확히 이 질문을 던지는 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이렇게 바라보는 일은 중요하고, 작가의 시선도 분명 이 질문을 향하고 있다. 다음 저서인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보면 좋겠다.



*삼성서울병원의 암 해설

http://www.samsunghospital.com/home/healthInfo/content/contenView.do?CONT_SRC_ID=27544&CONT_SRC=HOMEPAGE&CONT_ID=4199&CONT_CLS_CD=0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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