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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Mar 29. 2020

객관적이지 않은 의학을 생각하며 <3>

김승섭《우리 몸이 세계라면》

지식의 사회사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는 질병이 사회적이라고 했고, 이는 우리가 왜 질병을 사회역학이 아니라 분자생물학의 언어로만 받아들여 왔는지 질문하게 한다.


사회구조 대신 조직과 세포를 바탕으로 우리의 몸을 사유하게 만든 것은 자유진영의 이데올로기였다. 분자생물학의 승리와 푸코의 질문은, 질병에 관한 이해와 의학 지식이 사회적 권력의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런데 ‘의학에 작용하는 권력’이라는 명제보다 중요한 것은 배제된 존재들이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은 의학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몸은 객관적으로 연구되지않는다. 반대로 누군가가 몸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는 곧 다른 누군가의 몸은 연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의학에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한 분석은 그 남겨진 몸을 복원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라는 조금은 복잡한 문제의식은, 이러한 맥락에서 전작만큼 커다란 따뜻함을 획득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지식에 대하여: 여성의 몸이 사라진 과학


책에서는 두 가지 연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내용의 증상을 이야기할 때 의사의 반응을 살피는 연구다. 그 결과 ‘관상동맥질환’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 경우가 여성 64.1%와 남성 69.2%로 여성이 더 적었고, 따라서 관련 검사를 권하는 확률도 낮았다. 연구는 남성과 여성에 다른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의사의 편견을 드러낸다.


의사들의 편향적인 사고방식 때문인 걸까? 다음 연구는 이 편견이 의사 개개인이 가진 오류가 아니라, 의사들이 학습하는 표준적인 의학 지식 자체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연구는 ‘협심증’의 전형적인 증상인 흉부 불편감이 정말 전형적인지 의심한다. 여성 환자의 협심증이 흉부 불편감을 수반하는 경우는 29.7%로, 흉부 불편감은 협심증을 겪는 여성에게는 그다지 흔한 상황이 아니었다. 연구는 오히려 여성 환자의 70.7%가 호소한 비일상적 피로와 47.8%가 호소한 수면장애를 전형적인 증상으로 지목한다.


이 사례는 오늘날 의학이 다루는 신체가 누구의 것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형식적 평등이 지탱하는 기울어진 의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배제된 존재를 치료하는 다른 ‘의학’을 상상하는 일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질문하지 않은 과학이 남긴 것: 비윤리적 지식 생산 과정을 말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의학은 질문하지 않았다. 지식의 사실관계 이외의 무언가를 질문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승섭은 여기에서 그런 의학이 남긴 비극적인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1936년 미국 터스키기에서는 매독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지 않으면 건강에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하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치료하지 않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물론 그 대상은 국가의 도움이 없다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가난한 흑인이었다. 종전 후 정부 차원에서 시행한 치료까지 차단했다는 점에서 연구는 말 그대로 이들을 고문하고, 죽인 셈이다.


미국 공중보건국에서 연구를 도왔던 존 헬러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왜 충격을 받고 놀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 인종 문제란 없다. 그저 흑인들이 모인 동네에서 일이 발생했을 뿐이다. 나는 이 연구가 비교집단을 가지고 있는 명확한 연구이고 또 온전히 윤리적이라고 느낀다.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의사로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이다.

 

‘객관적’ 연구는 의학 지식을 축적한다는 명분으로 40여 년간 흑인을 괴롭혔고, 미국 전역의 흑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터스키기 연구는 질문하지 않는 의학이 배제하는 몸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시다. 질문하지 않은 의학은 자신이 지켜주지 않는 몸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몸들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자본은 지식을 어떻게 섭외하는가: 담배회사의 지식 생산2


심장병이나 매독 연구는 의학이 보호하는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선명하게 대비하지만, 당장 눈앞의 일로 다가오지는 않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학의 권력성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문제다.


‘스트레스’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의학이 아니더라도 피로한 상황을 지칭하는 문화적인 의미로 흔히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스트레스라는 개념은 누가 어떻게 떠올린 것일까?


놀랍게도 그 배경에는 20세기 중반에 담배회사와 생리학자 한스 셀리에 사이에서 일어난 결탁이 있었다. 셀리에 박사는 담배회사의 후원을 얻어, 암의 원인을 담배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할 근거를 궁리한다.


셀리에 박사는 담배와 암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회사의 입맛에 맞게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대신, 스트레스가 담배보다 중요한 암의 원인이 된다는 ‘객관적인’ 연구를 내놓는다. 스트레스 연구에 기초해 그는 담배를 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없다는 소견서를 법정에 제출한다. 스트레스는 그렇게 암을 설명하는 데 있어 담배보다 중요한 언어가 된다.


이러한 역사는 수십 년 후인 2011년에 와서야 담배회사의 내부문건을 검토하며 비로소 드러난다. 스트레스가 암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의학계에서 탐구 중인 영역이다.


하지만 스트레스에 관한 학설이 지닌 설득력과는 별개로, 스트레스라는 개념이 소위 ‘의학적 탐구정신’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스트레스라는 용어가 혹시 담배로 아파하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흡연할 ‘자유’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을까? 스트레스와 담배에 얽힌 일화는 우리의 미세한 삶을 구성하는 의학에까지 권력의 손길이 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모든 ‘객관적 의학’에 도전할 계기를 제공한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의학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 둘러싸여 있지만 실은 숨겨진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몸은 지키지만 다른 누군가의 몸은 필연적으로 소외시킨다.


이런 의학으로부터 모두의 몸을 평등하게 지켜내는 이상은 가능할까. 상투적이지만 자본과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목표다.


잠깐 셀리에 박사의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스트레스라는 개념이 담배의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학설의 타당성을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셀리에 박사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는 기업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고 연구한 보통의 연구원일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학설이 가진 가치를 인정받아 노벨상 후보로도 여러 차례 올랐다는 점에서 그는 오히려 훌륭한 학자에 가깝다.


지금도 수많은 연구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위해 수많은 사실을 쏟아내고 있다. 살아남는 연구는 돈이 되는 연구이고, 평등한 의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의학은 가진 자의 몸을 지키기 위해 발전한다. 객관적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단 채로.


그렇지만 이것이 현대 의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체제를 불문하고 (의학)지식은 권력을 위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분자생물학과 남성중심 의학, 그리고 인종주의 의학은 일제 시민만을 보호했던 일제강점기 의학과 양반 이상의 계층만이 누렸던 조선시대 의학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객관적 의학, 중립적 의학은 항상 권력의 편으로 기울고, 권력의 몸만을 위험에서 보호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평등한 의학을 위해 힘썼다.


제때 약을 구할 수 없는 서민들을 위해《향약집성방》을 편찬한 세종대왕이 있었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이 있었다. (정확히 일제강점기는 아니지만) 조선이 영토와 권력을 침탈당하던 사회적 상황에서 평등하게 우두법을 전파시킨 지석영이 있었다. 김승섭의 말을 빌리면, “이 땅에 필요한 지식”을 질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질문은 중요하다. ‘객관적’이고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의학적, 과학적 사실들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사실관계만을 따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실은 때로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나아가 어떤 사실이 만들어졌고, 어떤 사실은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밝혀야 한다. 어떠한 사실을 만들고 만들지 않은 권력을 인식할 때, 그로부터 배제된 존재를 복원할 수 있다.


의학 지식을 생산하는 권력을 어찌할 수 없다면 그것이 배제한 존재에라도 귀기울이는 게 최선이다. 쏟아지는 비를 멈출 수 없을 때 함께 맞아주는 행동과 같은 이치에서다.


분자생물학이 외면한 사회적 소수자, 남성중심 의학이 치료하지 않은 여성, 스트레스 개념이 숨긴 담배의 피해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객관적이지 않은 의학을 생각해야 한다. 객관성으로 무장한 무책임한 지식을 되돌아볼 때, 평등한 의학의 길이 열린다.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일하며, 어떤 연구를 어떻게 할지 매 순간 선택해야 했습니다. 연구주제를 정하고 논문을 쓰고 그 지식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나은 선택인지 판단하는 일이 제게는 항상 어렵습니다. 단기적인 성과만을 주목하는 오늘날 대학에서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의 몸과 질병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과학의 언어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1> 김승섭,《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8

<2> 미셸 푸코,《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오트르망 옮김, 난장, 2014, 특히 1,2장 45-46, 63-67쪽

<3> 김승섭,《우리 몸이 세계라면》, 동아시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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