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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Apr 28. 2020

침묵의 변증법 <1>

말의 형태가 될 때

말의 형태가 될 때


나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필자는 단과대 축구동아리에 속해 있다. 흔한 마초 집단이 그러하듯이, 젠더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고 페미니즘에는 적대적인 사람들이 대다수다. 공을 찰 기회가 많지 않아 축구 경기에는 참여하지만, 그다지 편안하진 않은 뒤풀이 자리에는 빠진다는 것이 최후의 변명일까.


이런 집단에서야말로 발언해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선배들의 언행에 맞서는 일이 쉽진 않다. 이에 관해서도 할 말은 많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우리 학과의 페미니즘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께서 베트남 음식을 사주셔서 뒤풀이 자리까지 따라갔다. 당연히 구성원들은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필자가 속한 동아리까지 닿게 되었다.


필자가 입학하기 일 년 전 단과대 새터에서 동아리 홍보를 하는데, 그 동아리에서는 축구를 좋아하는 남자 부원과 ‘잘생긴 오빠들을 보고 싶은’ 여자 매니저를 모집했다고 한다. 한 선배는 그 이야기를 하며 그 동아리 사람들은 ‘전부 걸러야 한다’고 말했고, 필자도 그들의 무딘 감수성을 떠올리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자리를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걸까?’ 찜찜한 느낌을 가진 채 며칠 고민했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나 자신이 부족한 게 아닌지, 오만한 게 아닌지.


우선 당사자성의 문제가 있었다.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긴 하지만, 결국 필자도 수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습득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완전히 떨쳐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더불어 나의 존재 자체가 이미 권력이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밤길을 그다지 무서워해본 적이 없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성적 수치심을 느낄 걱정도 거의 없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가 느끼는 두려움이나 불편함의 원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누구를 거르라고?


그렇지만 당사자성이 다는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말’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에게서 느낀 어떤 불편함이, 그들을 걸러도 된다는 (동의)로 탈바꿈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축구 동아리 사람들과 다를지도 모른다. 나는 동아리의 분위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말로 형체화하는 순간, 그 날선 감각은 무디고 오만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 순간적 간극에는,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남자들을 ‘그들’로 규정하고, ‘깨어 있는 나’는 안전한 이쪽 편으로 분류하는 오만한 자신감이 자리했다.


여기에 당사자성 문제가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감각이 말의 형태가 되는 순간 내가 감각했던 것은 당사자성 문제만큼이나, 말 자체의 문제였다.


나와 부원들, 이쪽과 저쪽이 다른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지가 문제였다. 감각을 말에 담아내는 행위는 불분명한 사유들을 명백한 언어의 틀 안으로 집어넣는 과정이었다. 명백한 언어는 나의 확신, 나아가 오만을 담보로 성립했다.


그때 나에게 정의는 조금 더 뚜렷했고, 나쁘게 말해 이분법적이었다. 그래서 말을 남용했다. 오늘의 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늘려 가는 중이다.



양념과 치킨의 질서


나는 또한 많은 말들을 겪었었다. 대학 강의에서 낙태죄 폐지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낙태금지법을 제정하고 피임까지 금지한 루마니아의 사례를 제시했다. 산모와 아이의 삶이 모두 망가졌었다. 누군가 강제적으로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면, 그 상황에 연루된 모두의 삶이 불우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낙태죄에 찬성하는 한 남학생이 그 이야기를 양념치킨의 양념이라고 했다. 치킨은 아이의 생명이고. 추측건대 이상적인 상황은 아이의 생명을 지키면서도 둘 모두의 삶을 보살펴 주는 국가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이 치킨이고 양념이며, 본질이고 비본질인지, 그런 게 존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학생의 말을 들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지? 산모의 고통도, 아이의 생명도 너무나 어려운 문제인데, 어떻게 본질과 비본질을 확신하는 거지? 말은 처리 곤란한 관념들에 명료한 질서를 부여했고, 그 질서는 참을 수 없이 거북했다.


한편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에 입학한 친구가 있었다. 온건 보수를 자처하는 그 친구는 나와 자주 다투었다. “백남기 농민과 세월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과잉 진압과 무책임한 정부의 문제는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이라는 말로 지나쳤다.


나는 백남기 농민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랐고, 세월호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너가 그 사람들의 진의를 어떻게 아느냐고 따졌다.


그 친구는 어쨌든 ‘팩트’라고 주장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주장이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비판이라고 말했다. 백남기 농민을 “폭력 시위의 책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존중했고, 세월호를 “정치화되지 않는 선에서” 기억했다. 지금은 이 논쟁보다 사소한 계기로 연락을 끊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질문했을 것이다. 너가 뭔데, ‘제대로 된’ 기억을 제시할 수 있냐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말들은 이쪽과 저쪽, 본질과 비본질, 진짜(기억)와 가짜를 나누었다. 하지만 삶은 그처럼 명백하지 않다. 그런 현실에 명백한 언어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오만할 뿐 아니라 그릇된 언어가 아닐까.


내가 이 글에서 드러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정의(正義)의 경계선보다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고민하는 나의 작은 마음에 가깝다.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없을까, 또 어떤 말이 말해질 수 없을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걸까.


서론이 길었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에 관해 하고팠던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최근 몇 편의 소설을 읽으며 이에 대한 생각을 다듬었다. 시작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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