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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Apr 28. 2020

침묵의 변증법 <2>

박금산,《남자는 놀라거나 두려워한다》

《남자는 놀라거나 두려워한다》


주인공은 남자 교수다. 사건은 어떤 저자가 형사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페이스북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데서 시작된다. 알고 보니 그 저자는 위안부에 관하여 썩 유쾌하지 않은 책(제국의 위안부)을 출판한 사람이었다. 교수는 출판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좋아요를 누른 것뿐인데, 괜히 불편해진다. 그래서 위안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나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반대 논거를 일목요연하게 공글려놓은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가 마음에 든다.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충분한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생각했는지, 교수는 마침 온라인 상태인, 자기가 아끼는 여자 제자(‘혜린이’)에게 대뜸 문자를 보낸다.


“매춘적 강간, 강간적 매춘, 이런 말 들은 적 있니?”


혜린은 당황했지만 이내 적당한 오프라인 약속을 잡는다. 직접 만난 자리에서, 제국의 위안부 저자를 ‘이상한 여자’라고 비난하는 교수에게 혜린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러자 교수는 둘이 아는 관계냐며, 책의 문학적 가치(없음)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친다.


“... 문체를 분석하면 완전히 남성적 시각으로 쓰고 있어. 여자면서. 위안부 희생자들을 천구백칠십 년대, 팔십 년대 호스티스 문학의 여주인공 쯤으로 보는 것 같아. ...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공감 능력이 안 보인다고 할까.”


혜린도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감히 인간 이해와 공감능력을 들먹이면서 ‘이상한 여자’를 욕하는 교수에게 환멸을 느낀다. 졸업생이라고는 하지만 교수에게 맞설 수는 없으니 혜린은 화제를 돌린다.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만, 여기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남자친구와는 일주일에 몇 번 만나는지 물어보고, 대답하기 꺼려하자 바람 피냐고 물어본다. 혜린이 불편해하자 교수가 제자한테 그 정도 말도 못하냐며 귀를 막는다. 여자라서 취업이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여자라서 힘들게 뭐 있냐고 반박하고, 따로 만나는 게 불편하다고 하자 편할 때나 가끔 만나자고 짐짓 여유를 부린다.


교수의 태도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이중적이다. 역사적 관념 속의 위안부 문제에는 무한한 정의감을 표출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의 불평등은 인식하지 못한다.


당사자성 담론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조선의 아픔이기에 앞서, 끌려간 여성 개개인의 아픔이다. 그것은 심지어 같은 여성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물며 성 정치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여본 적조차 없는 남성이 위안부를 설명한다면, 이는 불가능하며 오만이다.


회식 자리에서 불쾌한 접촉을 겪을까 걱정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해본 적도 없다. 데이트에서 원치 않는 스킨십을 상상하기 어렵고,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다다르기는 더욱 어렵다. 남성/교수의 지위에서 그 자신도 모른 채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주인공의 이중성은 당사자성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선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은 말 자체의 문제기도 한데, 조금 더 읽어볼 필요가 있다. 소설로 돌아가자면, 혜린은 교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게시하고,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성폭력 위원회에 신고하겠다고 선언한다. 교수는 우연한 계기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깨어 있는 지식인’인 자신을 향한 혜린의 분노에 황당함을 느낀다.



희생자와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교수는 학과 사무실로 도착한 우편물을 확인한다. 우편물의 정체는, 위안부 이슈에 관한 교수의 무지함과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뻔뻔하게 발언한 교수에 대한 비난이 담긴 편지였다. 핵심 논지는 교수가 할머니들을 표현하며 ‘희생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비판이었다.


교수는 ‘희생자’와 ‘피해자’의 용례를 뒤져가며 자신의 도덕성을 수호하려 애쓴다. 어디서는 사용하지 않아 불안해 하고, 어디서는 사용해서 안심한다. 입학시험문제 출제위원으로 위촉된 교수(교수는 국문과이다)는 사학자들에게 ‘희생자’와 ‘피해자’의 의미 차이를 질문한다. 이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고상한 학술적 논의가 펼쳐진다.


다른 학자들의 의견까지 얻어 가며 교수는 ‘희생자’라는 용어의 학술적 기원을 탐색해 나가지만, 여전히 혜린의 분노는 이해하지 못한다. 관념과 학문의 영역에서 희생자와 피해자를 공부할 뿐이다. 주인공 교수는 혜린과의 문제에 대해 한국사학자에게 말한다. “잘해준 것뿐인데, 씨발.”


이 대목에서 교수가 고민하는 주된 쟁점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희생자라고 불러도 괜찮은가 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교수는 그런 역사적 비극에 ‘희생자’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음 시간부터는 ‘희생자 없음’을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교수의 고민은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익명의 발신자가 비판한 지점은 단지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엉성한 앎을 말이라는 오만한 형태로 꿰어 맞춘 교수의 발화 행위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교수는 말을 반성하지 않는다. ‘희생자’라는 단어를 반성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교수는 옳은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는 말을 이해했어야 한다. 자신이 옳고 그름을, 본질과 비본질을, 피해자와 희생자를 말할 수 없다고 깨달았어야 한다. 하지만 교수는 계속 말을 갈구하고, 지식을 갈망한다.



지독한 말


교수는 책 한 권을 복사하러 여대에 방문했다가 알바로 일하는 혜린을 만난다. 《에미 이름은 조센삐》라는 책이었는데, 교수는 제목이 모욕적이라는 둥 문학사적 의미가 어떻다는 둥 설명해댄다. 성기라는 표현이 모욕적이고, 영화 제작물은 포르노적이며 섹스밖에 없다는 등의 설명에 혜린은 모욕감을 느낀다. 교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또 다시 원치 않는 만남을 강권하고, 혜린은 적극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내비친다.


하지만 얼마 뒤 혜린은 대학원 진학 추천서를 얻기 위해 교수를 찾게 된다. 교수 같은 인간에게서 추천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설정은 잔인하리만큼 현실적이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코믹하다.


... 사과한다. 늦었지만.
교수님도 억울하시겠죠. 제가 유별나다고 느끼시겠죠. 하지만 저를 수치스럽게 했던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선량한 가해자라 할지라도.
선량한 가해자라니?
잘못한다는 인식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가해자요.
내 가해 내용을 정리해줄 수 있니?
왜요?
배워서 앞으로는 그런 가해 안 하려고.
???
나중에 정리되면 알려줘.
???????
선량하다는 말은 내게 과분한 것 같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지. 정말 반성 많이 했다.


피해를 ‘정리해 달라’니, ‘나중에 정리되면 알려 달라’니. 참으로 지독한 말이다. 지독히도 정직하고, 지독히도 정의로워서,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지독히도 오만한 말이다.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는 고통이 있고, 담아내서도 안 되는 고통이 있음을 교수는 알지 못한다. 혜린은 교수의 추천서를 얻지 않는다.



출발의 서사


조금 스킵해서 결말로 넘어가겠다.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혹은 상상도 못한 결말은 아니었다. 내가 문학을 읽으며 바라는 신선한 상상력은 아쉽게도 찾을 수 없었다.


교수는 이삿짐센터에서 알바하고 있는 혜린과 또 다시 만나지만, 이번에는 혜린이 업체와 상의하여 일을 뺀다. 혜린이 독단적으로 일을 뺀 게 아니라 업체와 상의했다는 점에서, 교수는 혜린이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대신 세상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도 바뀌기로 한다.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독립영화 <주전장>을 보고, 페이스북에 감상을 남기며 내일 한 번 더 보겠다고 말한다. 이튿날 <주전장>을 상영하는 극장에서 교수는 혜린을 만나고, 극장에는 둘뿐이다. 교수는 혜린이 지켜보는 아래쪽에 앉아 불편한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본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화가 끝나자 교수는 그냥 집에 돌아간다.


그런데 교수에게 메신저가 온다. 혜린은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교수의 게시물을 보았고, 여전히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는 인간인지 확인하러 영화관에 온 것이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실천한 교수에게 혜린은 “좀 변한 게 있으시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여전히 군데군데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면서도, 계속 변하라고 한다.


삭발을 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씨발. 입에서 욕이 나왔다. 그래. 날기 위해 버리자. 다르게 쓰자. 다르게 살자. 나는 너에게 얼룩이고, 트리거이고, 변화시키고 싶은, 유죄. 그렇게 큰 의미여서 고맙다. 그래, 의미를 만들어보자. 그는 마지막 인사를 생략했다. 대신 이렇게 외쳤다. “그래, 알았어.”


앞서 말했듯이, 평이하다.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다’는 ‘같은 편’의 비판을 듣고 고뇌하던 남자 작가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선에서 만든 결말인지도 모른다. 솔직히, 조금은, 억지로 따뜻한지도 모른다. 교수는 자신의 말을 한 번 지켰을 뿐, 계속 말을 배출한다. (뭘 알았다는 것인지 웃기긴 하다.)


여기서 소설이 제시하는 가능성은 실천이다. 당사자성과 자격 그리고 말의 문제를 인식했다면, 적어도 내뱉은 말이 공허해지지 않도록 행동에 나서자는 말이다. 그럼에도 질문하게 된다. 실천하면 말할 수 있는가?


이쪽과 저쪽, 본질과 비본질, 제대로 된 기억법, 희생자와 피해자. 얼마나 실천해야 떳떳할 수 있고, 얼마나 행동해야 입을 열 수 있을까. 영화를 두 번 보면 교수는 혜린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걸까. 실천의 힘은 강력하지만, 소설의 시각에 조금은 회의적이 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는 최후의 서사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고 비판하는 출발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젠더권력과 당사자성, 그리고 무엇보다 말의 문제를 인식하려는 기성세대 작가의 시도라는 맥락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소설은 말의 문제에 관해 뚜렷한 그림을 제시한다. (현실이 그만큼 뚜렷하지 않은 것이 또 문제겠지만.) 이 감각은 계속 가져가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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