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el Liebe Apr 28. 2020

침묵의 변증법 <3>

최은영 「몫」,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침묵, 최후의 정치


최은영의 「몫」은 1990년대 대학 편집부원이었던 ‘정윤’과 ‘당신’이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과거 기억을 회상하는 소설이다. 이들의 기억 한가운데에는 당신과 같은 시기에 입부했고 정윤을 좋아하고 따랐던, ‘희영’이 자리한다.


희영은 “날카롭고 유려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개성”을 지닌 글을, 당신에게 “영원히 희영과 같은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주는” 글을 쓴다. 희영은 노동자와 계급의 문제에 앞서, 젠더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의제화한다. “맞아 죽은 여자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의 역사를 탐구하고, 기지촌 여성 살해 사건이 정치적으로 대상화되는 현상에 문제를 제기한다.


맑스주의와 계급정치가 지배하는 공론장에서 여성의 삶을 제1의제로 만드는 일은 녹록지 않다. 기성 진보정치관을 대변하는 ‘용욱’은 ‘시의성 있는’ 다른 문제보다 젠더 불평등에 집중하는 희영의 시선이 편협하다고 비판한다. 무엇이 시급하고 무엇이 나중의 문제인지 정의하는 용욱의 말에는 어떤 오만함이 담겨있는지도 남성으로서 성찰해볼 지점이지만, 소설은 보다 근본적으로 희영의 말에까지 질문을 던진다.


정윤은 윤택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희영이 몸을 팔 수밖에 없는 가난한 기지촌 여성과 연대하려는 것이 오만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희영은 (평소와 달리) 용욱의 편에서 자신의 당사자성 문제를 지적하는 정윤의 말에 상처받는다. 다음 학기에 정윤과 희영과 용욱은 동아리를 떠나고, 당신만이 동아리에 남아 계속 글을 쓴다.


희영은 동아리를 떠나 기지촌 활동가가 된다. 그런 글솜씨를 지녔던 희영이 기지촌 활동가의 삶을 살기로 했다는 사실에 당신은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당신은 희영을 만나고, 희영이 계속 글을 쓰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한다. 하지만 희영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불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정윤 언니가 그랬지. 나는 이 문제로 글을 쓸 수 없다고. 어쩌면 그 말이 맞았는지도 몰라. 가끔씩 언니들의 마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내가 그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윤 언니의 말을 생각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착각하지 말자고.


희영은 자신의 말할 수 없음을 똑똑히 인식한다. 내가 정의롭다고, 내가 이쪽 편에 섰다고, 내가 이들을 안다고 말할 수 없음을. 내가 내 몫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희영이 옮겨간 실천의 영역은 앞의 소설처럼 말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침묵과 실천은, 자신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식한 인물이 선택한 최후의 정치다. 내가 영화를 두 번 보더라도 피해자와 희생자를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기지촌 여성을 위해 활동하더라도, 그들을 위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우리가 각자의 몫을 다하는 방법에 관해 「몫」이 전하는 대답은, 우리가 우리의 몫을 다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진실을 논하려는 어떤 유려한 언변도 결코 그 자체로서 충분한 진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도 말할 수 없다.



슬픈 침묵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몫」의 메시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말의 정치를 고스란히 비춘다. 용산과 세월호, 미투운동과 텔레그램을 둘러싼 수많은 사회적 담론도 말의 정치고, 그러한 사건들을 다루는 ‘() 이후의 문학’들도 말의 정치다.


말의 정치들은 끊임없이 규정한다. 여기까지 옳고, 저기부턴 그르다. 이 영역은 본질이고, 저 영역은 비본질이다. 저쪽은 부당하고, 난 이쪽 편이다. 「몫」은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는 말들을 일단 넣어두자고 한다. 이념과 진영, 관점의 차이를 넘어 소설은 우리가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다는 슬픈 깨달음을 도출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연코 무책임하다. 할 수 없는 말들이 지배하는 말의 정치 너머에서, 우리는 말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는 동시에 지금의 글을 넘어서지 않고는 침묵을 깰 수 없는 필자의 문제기도 했다.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낙태 이슈를 둘러싼 논쟁과 현실의 삶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소설은 ‘지수(나)’가 ‘당신’을 호명하는 편지의 형식으로 시작한다. 당신은 지수의 여동생인 ‘해수’가 포태한 조카아이다. 아직 만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동료 의사와의 관계에서 나온 아이였기 때문에, 엄마는 “진짜 순간”이었던 낙태를 떠올린다. 엄마는 지수와 해수 사이에도 두 번의 낙태를 경험했다.


지수는 해수에게 낙태를 이야기하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믿고 따른 저명한 젠더 건강 칼럼니스트인 ‘희진 언니’의 초고를 합평했던 스터디 모임을 회상한다. 희진 언니의 주장에 따르면, 이제는 안전한 낙태의 선택지가 생겨났고, 더 이상 낙태는 공포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수는 동시에 낙태를 제안받은 해수 그리고 당신이 입을 상처를 생각한다.


만약 그리된다면 어찌해야 할지. 그때의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지수는 낙태 시술을 집도했던 ‘정민 선배’의 초고를 떠올린다. 그 글은 낙태죄 폐지를 지지하는 “울림이 있는” 글이었다. 하지만 정민 선배는 글의 호소력을 위해 어떤 기억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그것은 자신이 시술한 아기가 꿈에 나타난 기억이었다. 당시 자기 뱃속의 아기와 자신이 시술한 아기는 겹쳐졌고, 정민 선배는 사무치게 괴로웠다.


지수는 “배아마저 아기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습적인 재현이 아닌지, 그렇게 관습적으로 재현되는 음울함만이 임신중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감정이어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지만, 말하지 않는다. 그런 비판이 정민 선배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지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말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더라도 말의 형태에 담겨서는 안 되는 사유가 있다. 아무리 멋지고 세련되더라도 누군가를 상처입히는 말이 있다.


합평이 끝나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자, 희진 언니는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말한다. 옳다고 믿어도 그 말할 수 없음에 좌절하고 마는 희진 언니의 조언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지촌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희영의 슬픈 고백이 담겨 있다. 우리는 결국, 무엇도 말할 수 없는 걸까.


최후의 침묵을 깨고


이번에는 해수의 결혼식 날, 신혼여행을 떠나는 해수와 함께 뱃속의 아이에게도 배웅을 해주던 순간으로 이동한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도 않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던 ‘당신’, 그런 당신에게 최초의 인사를 건넨 그 순간.


지수는 나지막하게 그 말을 내뱉자마자 입때껏 자신을 괴롭힌 서늘함이 떠나가는 감각을 느낀다. 그 감각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으리라. 임신중절수술의 가능성을 떠올렸던 한때의 고뇌에도, 머잖아 태어날 새로운 생명을 그려보는 지금의 애착에도, 모두 사랑이 담겨 있음을, 지수는 깨달았으리라.


당신에게 최초의 인사를 건네고 생각한다. “이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고, “기약할 수 없는 언제인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이어야 한다고. 지수는 지금까지 합평 모임에서 느낀 불편함을 고스란히 글로 옮긴다.


지수는 임신중지수술이 절박한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임신중지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고 강요하는 작금의 서사는, ‘우리’(여성, 산모)의 주체성을 지우며 ‘우리’를 “나약한 존재”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한다.


지수는 “반려되리라는 확신 속에서도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전해지지 않아도 전할 수밖에 없는 진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말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은, 정의도, 도덕도 아니다. 낙태를 생각하는 순간조차도 지수가 분명하게 느꼈던 사랑,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된 진실한 마음이다.


아기의 생명권 대 부모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윤리적 정치적 대결구도는 희미해지고, 사랑이, 마음이 남는다. 지수가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서, 소설은 각자의 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연대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배가 더 불룩해진 해수는,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판결을 보며 지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 해수도 아이에 대해 잠시 고민했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해수는 아이를 낳기로 결단했다. 그런 해수에게 지수는 말한다.

나도 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둘이 서로 다른 형태로 행복을 추구했을지라도, “우리의 행복”이라는 조건에서 둘의 행복은 연대한다. 정의와 본질 같은 것들은 낄 데가 없다. 지수와 해수의 사랑, 당신을 향한 지수의 사랑, 그리고 바라건대 모두의 행복만이 남는다.


지수는 생각한다. 한때 낙태를 권할지 고민했던 당신이 머잖아 태어난다면, 자신은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지닌 당신에게 영락없이 빠져들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권유한 낙태를 해수가 받아들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을 향해 가졌던 사랑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지수는 이야기를 마친다.


지수의 마음이 낙태를 바라보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할 수는 없다. 애초에 모두의 마음은 하나로 대변될 수 없는 저마다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표정이 하나만은 아니"라고 소설은 말한다.


하나의 행복과 하나의 낙태는 불가능하다. 지수의 행복과 해수의 행복은 형태가 달랐다. 엄마, 지수, 해수, 희진 언니와 정민 선배가 바라본 낙태도 모두 달랐다. 하나의 행복, 하나의 낙태를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소외되었다.


그래서 지수는 하나의 무엇을 말하기 두려워했다. 희영도, 희진 언니도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고, 침묵이라는 최후의 정치를 택했다. 하지만 지수는 침묵을 깨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지수는 임신중절수술을 절박한 상황에서 최후의 선택으로 재현하는 서사를 비판함으로써, 그 서사에서 지워진 자신의 존재를 복원한다. 낙태를 전제한 (다른) 세계에서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하지만 낙태를 하지 않은 지금의 세계에서도 동등하게 행복한 자신의 존재.


기존의 서사가 부정의하고, 자신의 서사가 정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믿기 때문에 지수는 목소리를 낸다. 이는 하나의 정의로서 내세울 수는 없는 개별적 마음이지만, 자신에게는 여전히 단 하나뿐인 마음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아니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롭거나 완전무결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겸손하고 진실할 것이다. 이 마음들이 모이는 데서, 각각의 세계가 온전히 연대하는 데서, 새로운 말이 출발할 것이다. 누구도 해치지 않을 말이.


걸러도 되는 저쪽 편을 설정하는 대신, 함께 공을 주고받으며 쌓였던 마음을 조금 더 살펴보았다면 어땠을까. 양념과 치킨의 질서로써 정형화된 본질을 강요하는 대신, 태아의 생명을 바라보는 소중한 마음을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말할 수 없는 마음을 재단하여 제대로 된 기억법을 주장하는 대신,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마음을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희생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위안부의 정의를 논하는 대신, 위안부라는 비극에 얽힌 수많은 마음들을 헤아렸다면 어땠을까.


우리 모두, 하나의 마음, 하나의 정의, 하나의 무엇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면 어떨까.


그리고 다시, 나 하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해 본다면 어떨까.




<2>

박금산, 《남자는 놀라거나 두려워한다》, 도서출판 b, 2020

<3>

최은영, 《몫》, 미메시스, 2018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매거진의 이전글 침묵의 변증법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