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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el Liebe Jul 09. 2020

‘Black’ Lives Matter의 이유 <1>

흑인 사회운동가 오드리 로드와 제자백가 철학자 장자를 중심으로

*대학에서 들은 "동양으로 서양읽기" 과목의 기말 레포트입니다. 서양 사상 또는 서구적 현상을 장자적 관점에서 독해하는 일이 목적이라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접근입니다. 당연하게도 이 글이 장자 사상 전체를 다루지는 못했다는 점도 미리 밝혀둡니다. 경어로 작성되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지난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페리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했습니다. 위조지폐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 데릭 쇼빈은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졸랐습니다. 플로이드가 정신을 잃었음을 확인했지만 쇼빈은 진압을 멈추지 않았고, 플로이드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비단 미국의 흑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인종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달고, 아직까지도 은밀하고 또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인종차별을 멈출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이하 BLM 운동)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담론은 차별의 기제에 관한 여러 섬세한 진단을 내놓는 데까지 발전했지만, 정작 우리 눈앞에서는 19세기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명백한 인종차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씁쓸한 일입니다. 백인의 무릎이 흑인의 목을 짓누르는 장면은 마치, 서구 사회의 인종주의를 묘사하는 기괴한 삽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의 시위로 번진 현상은, 플로이드 사건의 특수성보다는 ‘드디어’라는 수식어로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흑인을 대상으로 한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15년*과 2019년** 발생한 10대 흑인 소년 총격 사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상징적 사건들이 일어나 왔습니다.


과잉진압만이 아닙니다. 흑인을 향한 폭력, 차별, 억압은 사회 곳곳에, 삶 곳곳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위의 구호는 경찰도 진압도 아닌, 흑인의 삶/생명을 이야기합니다.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부렸던 수백 년 전부터 인종주의는 시간에 따라 형태를 바꾸며 존속해 왔습니다.


억눌린 집단의 분노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혁명적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독재와 귀족정에 반대해 시민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일으켰고, 자본가의 착취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시민을 보호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고, 사회주의의 불씨는 꺼졌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18세기에 비해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에 더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흑인은 아직 체제를 전복시키는 변화를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혁명보다는 훨씬 유순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흑인의 삶을 외치는 전 세계적 움직임에는 ‘드디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합니다. 드디어,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변화입니다.


시선


하지만 BLM 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습니다. 운동의 구호를 ‘흑인의 생명만 소중하다’라고 해석하고 이에 반대하는 구호를 확산시키는 세력도 존재합니다. 이들은 “White Lives Matter”나 “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내세웁니다.


미국의 보수 언론은 시위에서 벌어지는 약탈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마치 BLM 운동이 흑인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대신 백인의 인권을 공격하는 움직임인 것처럼 보도합니다. 백인 경찰관이 적법한 절차를 지키지 않아 흑인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지만, 흑인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는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언론의 보도 경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BLM 운동에 대한 양비론이 발생합니다. 흑인이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의 투쟁은 곤란하다. 백인들에 의해 흑인들이 억압받고 있지만, 흑인들의 저항은 백인들의 룰에 따라야 하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입니다.


백인들이 만들어 놓고 심지어 어기기까지 하는 룰을 억압받는 흑인이 위반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성차별이 존재한 것은 맞지만, 여성들은 남혐하지 말고 양성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BLM 운동을 바라보는 동양-기득권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흑인들도, 흑인들이야말로 동양인을 차별하는데 흑인이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비판입니다. 어디부터 실제 경험이며 어디부터 와전된 괴담인지는 알 수 없으나, “Yellow Lives Matter”라는 BLM 운동에 대한 독특한 비판적 논조를 형성합니다.


덧붙여서 넷플릭스 코리아에서 BLM 운동에 동조하며 올린 문구를 살펴봅시다. 위의 것이 넷플릭스 본사 문구이고, 아래 것이 넷플릭스 코리아가 번역한 문구입니다.


To be Silent is to be complicit. Black lives matter. (침묵하는 것은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흑인의 삶도 소중합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소중합니다.


넷플릭스 코리아는 트위터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두 번째 문장을 삭제했다가 결국 문구 전체를 내려버렸습니다.**** “침묵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는, 성폭력 사건에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미투 운동 당시에 침묵한 수많은 남자 연예인들을 비판하는 데에 인용됩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소중합니다.”는 앞서 언급한 “All Lives Matter”와 같은 맥락에서, BLM 시위와 충돌하는 입장의 문구입니다. 결국 넷플릭스 코리아는 BLM 운동의 지지 성명을 상당히 엉뚱하게 번역한 셈입니다.


넷플릭스 코리아의 사례는 상징적입니다. 흑인을 포함한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자기 나름대로는 좋은 취지의 주장이 BLM 운동에 대한 감수성 부족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삶이 소중하다는 따뜻한 말이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이로부터 저는 어째서 Black Lives Matter와 All Lives가 충돌하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흑인의 인권과 백인의 인권이, 흑인의 인권과 황인의 인권이, 흑인의 인권과 모두의 인권이 충돌할 수밖에는 없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성철, “美 경찰, 10대 흑인에 16발 총격…시민들 분노”, SBS 뉴스, 2015.11.25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85671&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최동혁, “[지금 세계는] 미국 경찰 또 ‘과잉진압’…흑인 소년 ‘피범벅’”, KBS 뉴스, 2019.04.26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188588

***김종성, “이런 식의 흑인 시위 보도는 우리에게도 해롭다”, 오마이뉴스, 2020.06.02

https://news.v.daum.net/v/20200602071800020

****nomodem, “넷플릭스 코리아의 트윗에 분노하는 이유”, 슬로우뉴스, 2020.06.02.

https://slownews.kr/7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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