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기독교인이자 전업주부인 엄마는 살림과 자식의 학업은 등한시하고 종교를 늘 최우선으로 두었다.
초등학교 때 등교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면 '네가 늦지, 내가 늦냐'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며 어떤 차림으로 학교에 가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반면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우리는 전쟁이었다.
일요일 루틴은 정해져 있었다. 일요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 있어야 되는 날로 아침에 목욕을 한 다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옷을 입고 머리를 한다. 사람들 앞에 서서 성경구절을 외우고 억지로 피아노 봉사를 했다. 그야말로 엄마의 꼭두각시가 되는 날이다.
집에서도 성경구절을 외워야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매일 한 장씩 성경을 필사하지 않으면 체벌을 했다. 신년마다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며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새벽기도에 가다가 헛구역질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게 소극적으로 찬양을 하거나 기도하면 깜깜한 교회 기도실에 처넣어 큰 소리로 기도하게 했다. 목표는 3일 금식이었지만 엄마가 스스로 2일 차 점심을 넘기지 못하고 실패해서 다 같이 라면을 먹었던 기억도 난다.
TV를 보면 나쁜 영이 들어간다며 보지 못하게 했고 아플 땐 의사가 아닌 목사 앞에 나를 세웠다. 손목이 다쳐 깁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목사가 괜찮다고 하니 나를 할머니댁에 맡기고 부흥회에 간 적도 있다. 그때 내가 왼팔을 쓰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할아버지가 병원에 데려가 깁스를 했었다.
별의별 교회와 기도원, 집회도 가보았다. 귀신을 빼내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사지를 붙잡고 원장이라는 사람은 몸에 올라타 눈을 짓누르며 기도했던 곳, 이 날 아빠도 같이 갔는데 기도받고 굉장히 화를 냈었다.
집회 때 사람들이 다 같이 서서 기도를 하면 목사가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쓰러뜨리는 곳은 기본이며 (그냥 앉을 때까지 머리를 누르던데..)
방언기도를 하면 해석을 해주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공통되게 느꼈던 건 감사헌금 안 내면 개인 기도 안 해줌, 무당과 다를 게 없다.
아빠는 엄마가 종교에 너무 심취해 있어서 제대로 배워보라는 취지로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 엄마도 신학교에 입학했다. 덕분에 엄마가 컴퓨터로 해야 하는 과제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항상 닥쳐서, 자는 나를 깨워가며 억지로 본인 과제를 하게 시켰다.
엄마의 학교생활을 보며 신학교도 별 거 없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엄마는 신학교 졸업 후에도 달라진 게 없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교리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여서 그런지 점점 더 주변사람(특히 아빠)을 무시했다.
엄마에게 질릴 대로 질려버린 나는 엄마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그곳이 나에게는 더 이상 천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교회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던 중 엄마가 본인의 마음에 맞는 교회를 발견하게 된다. 집에서 차로 1시간 이상 소요되는 그 교회에 엄마는 버스를 타고 주 3회, 1박 2일 동안 머물다 왔다. 나도 그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천국을 보고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이 겪은 환청, 환시를 자랑하듯 떠드는 모습이 기괴했다.
엄마는 그걸 들으며 부러워하고 자신도 천국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20년 가까이 그 교회에 다녔음에도 다행히(?) 천국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엄마가 다니는 그 교회가 사이비인지 이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의 부재가 적어도 나에게는 쾌재를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엄마는 그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이 날로 더 깊어졌다. 집에 있는 시간에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인터넷으로 계속 말씀을 들었고 가래침을 뱉어가며 개구리처럼 중얼중얼 밤낮으로 기도했다. 엄마는 온 가족이 그 교회에 다녔으면 했지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에게 교회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해달라고 요구했다. 아빠는 이혼하는 조건으로 방을 구해줄지 고민했지만 나와 동생은 반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혼은 찬성이지만 방을 구하는 건 엄마 힘으로 해야 할 일이다. 진작 이혼했어야 했는데 여태 엄마를 떨쳐내지 못 한 아빠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엄마는 우리 집의 골칫덩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