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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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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저는 작년에 입사를 했고, 그 전 해에 면접을 보았습니다. 잡지에서 사진들을 오려다가 면접관들이라 가정하고 벽에 붙이고는 더듬더듬 말하는 연습을 하곤 했었어요. 면접을 위한 지침서들을 참고하며 여러 가지 모의 질문들을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그중 의외로 가장 난감했던 질문은 바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러한 인물상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오해하진 마세요! 제가 석가모니도 아니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자아에서 출발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것은 좀 더 순수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일 뿐이에요. 실은 아예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거든요. 굉장한 고민을 시작하기 시작했어요. 간호사로서 일하는 것이니 ‘나이팅게일’로 설정을 해서 말을 꾸며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시 가장 핫했던 ‘스티브 잡스’로 정해놓고 트렌드에 민감하게 구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암튼 이틀 정도는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전자는 너무나 전형적이라는 이유로, 후자는 오히려 줏대 없어 보일 것 같다는 이유로 스스로 퇴짜를 놓았습니다. 그때 저는 당장 누구를 존경해야만 했었을까요.


제 친구 중 매우 꿋꿋한 성격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5년 차 간호사이자 벌써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합니다. 어떤 여성들에 있어 0이 여섯 자리가 넘는 가방과 지갑이 자신을 대변한다면 애엄마들은 값비싼 유모차가 그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중고유모차를 구입하고 조카가 입던 아기 옷들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는 아이들에게 입힙니다. 육 개월만 지나도 못 입을 것들에 돈을 쓰기 싫다는 이유였지요. 그렇다고 그녀가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도 아녜요. 스타일이 중요한 자리에는 그럴듯하게 꾸밀 줄도 알고, 아득바득 돈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두 곳이 넘는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도 하고 있습니다. 연말 기부금 소득공제는 덤이지만요!


프리셉터와 함께 두어 달을 고생했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르치려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싶었겠지요. 무엇보다도 C-line 드레싱을 할 때의 야무진 손놀림,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그대로 복사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말 MICU1에 들렀던 한 레지던트에게서는 젠틀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내뿜으며 환자에게 열과 성을 쏟는 그 책임감에 굉장히 감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맡았던 환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사망 선언 직후 내쉬었던 그 진심 어린 한숨이 그의 큰 키와 함께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의료진을 배려했던 몇몇 환자들과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던 어떤 보호자들에게서는 멋진 인내, 그리고 이성적인 담대함까지 배울 수 있었어요. 정말이지 모두들 훈훈한 사람들 같지 않나요?


면접 때 다행히도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았습니다만, 언젠가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제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나이팅게일만큼 간호를 잘할 수는 없지만, 스티브 잡스보다 스마트폰을 잘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부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이죠. 게다가 실제로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런저런 업적들 덕택에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포장되고 거창하게 신격화된 인물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간미가 차다 못해 넘치고, 게다가 가끔 커피 한 잔도 같이 할 수 있잖아요. 재미있게 수다도 두어 시간 떨면서요. 말 나온 김에 처음에 언급했던 친구네 에 조만간 놀러 가야겠어요. 그녀가 좋아하는 차가운 홍차와 꾸들꾸들한 식감이 일품인 옥수수 스콘을 사갈 생각입니다. 참 멋진 오후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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