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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Light

1404

by 바셀린

그녀, 그린 라이트일까요?


앙큼하게 머리를 묶고, 그보다 더 상쾌한 걸음으로 걸어옵니다. 지나간 자리에서는 항상 풋풋한 수선화 향이 나요. 하루에 꼭 두 번, 이토록 멋진 그녀를 만납니다. 백 일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어요. 참으로 끈기가 있는 타입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친 기색을 보여준 적도 없어요. 게다가 만날 때마다 어찌나 반갑게 인사를 해주는지 체력과 예절을 겸비한 훌륭한 여성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초롱초롱 빛나다 못해 번쩍거리는 그녀의 두 눈은 날마다 희망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들어오는 것도 같습니다. 어라, 벌써 9시 58분이네요. 2분 후면 그녀가 당도할 시간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말을 걸고, 눈을 마주치려 하고, 오늘은 어떤 것이 달라 보이는지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손등에 키스를 하기도 하며, 어제보다 조금 더 차가워진 발을 문지르기도 합니다. 보통의 연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지만 어쩐지 머쓱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한참을 그러고는 저에게 넌지시 묻습니다.

"선생님, 이 남자 정말 괜찮아질 수 있을까요?"


그녀는 그린 라이트가 켜지길 바라는 것이겠지요. 검푸른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친 어부들을 인도하는 등대 같은 빛을 원하는 것일 테지요. 사실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잿빛 사암처럼 그녀의 남편은 침대 위에서 시나브로 악화되고 있을 뿐입니다. 위급상황 시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 작성을 단번에 거절한 그녀에게 저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요. 저는 비록 선명한 초록색 옷을 입고 마치 간호의 프로 인양 굴어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색하게 퇴장할 뿐입니다.


어느새 10시 30분이 훌쩍 지났습니다만, 여전히 그녀는 남편 곁에서 창백한 얼굴을 비비고 있네요. 그 따뜻한 손길이,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차마 면회를 끝내 달라는 말을 건넬 수가 없어요. 시계를 못 본 척 저는 제 할 일을 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간호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생명의 그린 라이트는 어찌할 수 없지만, 당장의 푸른 신호등은 꺼달라고 말하지 않으려고요.


오늘도 수많은 환자들이 희망을 품고 병원을 방문합니다. 저마다의 그린 라이트를 바라며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떼겠지요. 그들의 불빛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린 라이트가 그저 막연한 소망 같은 것이 아니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초록색 옷을 입습니다. 기꺼이.





중환자실은 하루에 두 번씩 정기면회가 있습니다. 오전 10시, 그리고 오후 8시입니다.

보호자와 환자가 조우하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늘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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