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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Apr 20. 2021

관심법

2104

  연애 초기에는 그 사람의 숨소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곤 했었다. 둘 숨과 날 숨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랬다. 전화 상 미묘한 목소리 톤의 변화는 물론, 카카오톡을 하며 `ㅋ´의 개수와 상태 메시지가 너무나 신경 쓰여 그 연유가 궁금해 죽겠는 초조함이 즐거웠다. 만나서는 어떤 모션으로 어떻게 말을 내뱉고 어느 쪽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기분 좋을 때 어쩌면 저렇게 껄껄대며 웃는지. 목젖을 내놓고는 맘 놓고 소리를 내는 듯했다. 차가운 사이다 같은 미소와 딱 떨어지는 턱이 참 괜찮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 딱히 두근거리지는 않지만(당연히!), 나름의 우려와는 달리 상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거나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더 민감해지고 완전히 받아들여지는 단계가 가능한 경지이다. 긴 말하지 않아도, 눈만 힐끗 봐도 그 사람의 기분이 투명하게 보인다. 어떤 것에 열광하고 어떤 부분을 극도로 싫어하는 지를 매우 잘 알게 되어 애초에 딱 맞추거나 아예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매듭을 짓고 무엇이든 시작하게 됐다. 그것도 몹시 자연스럽게. 세월이 주는 푸닥거림이 있었지만 다 지낼 만했고, 다행히도 치명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은 없었다. 누가 그랬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사랑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유지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아직도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상식 이내라면 기꺼이 품으려는 마음씨.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 시선이 그저 쿨한 관찰자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처음에는 잘 알 수 없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환자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행위가 필요한지는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오더만 수행하기 바빴고, 사실 그것도 벅찰 때가 많았다. 게다가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딱히 부정하는 사람도 없어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은가 싶었다. 오더와 시트지만 쳐다보는, 어쨌든 오류만 내지 않으면 되는 간호사, 아니 월급쟁이. 딱 거기까지였다. 그때까지는 남들도 다 이렇게 일하는 줄 알았고, 어느새 안주하고 있었더랬다. 찬물에서 서서히 데워지며 자신이 익어가는 것도 모르는 개구리 같았다. 분명 누군가는 충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듣지 않았을 것이다. 안 들렸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았을 테니. 스스로 납득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못된 성격인 탓도 크다. 

여느 때처럼 자세 변경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나오려는데 시트가 너무 구겨져 있었다. 바로 나와서 이런저런 데이터를 기록하려다가 자꾸만 시선에 그 주름이 걸려 일단 잡아당겼다. 생각보다 단단히 겹쳐 있어서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의외로 말끔히 펴졌다. 그러고는 뒤돌아섰는데 가만히 누워있던 환자가 나를 불렀다. 매우 사무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지금은 기관 삽관한 상태라 목소리는 나오지 않으니 할 말이 있다면 여기 메모판에 적고 다시 불러 달라고 했다. 환자 앞에 있는 컴퓨터를 붙잡고 칼퇴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는데 환자가 탁탁, 메모판을 치며 나를 불렀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의 냉랭한 태도로 다가갔다. 환자가 보여주는 메모판에는 `아까부터 주름이 불편했는데 펴줘서 고마워요.´라는 문장이 구불구불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순간 뒤통수를 누군가 내려친 듯했다.

 해일처럼 밀려왔다. 여태 간호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행했던 모든 행위들, 나도 모르게 이 정도면 됐겠지, 하는 최악의 안도감, 그에 따른 가벼운 마음가짐. 결정적으로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순간들이 칼날처럼 스쳤다.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까지 스며 나왔다. 쿡쿡 쑤시는 이 감정, 아하, 나도 양심이 있긴 있구나. 환자가 아니라 사람을 대한다는 것을 말로만 떠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데이터만 갖고 일희일비하고 오더에만 벌벌 떨었던 모습 또한 화끈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가 스스로에게 이토록 기폭제가 될 줄은 몰랐다. 간호사로서 반드시 필요했던 개안(個眼)의 찰나였다고 감히 정의한다.


 결국 모든 건 관심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여겼다면 지금의 나와 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안정되고 견고한,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관계 따윈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환자를 한낱 대상이 아닌, 사람으로 여기는 당연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면 아직도 검사 결과만 줄줄 읊으며 애초에 무엇이 결여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뻔뻔하게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더와 오더 사이가 들려주는 깊은 간극은 못 본 척하고 어떤 것이 중한 것인지 사고할 틈조차 무시하며 컴퓨터만 붙잡고 모니터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섬세한 관심과 의미 있는 업무에 대한 과감한 배분 같은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가 24시간 내내 침대에 누워있든 말든 조금 움직인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신체 보호대나 적용하고 주어진 스케줄에 약이나 주고 시간만 때웠을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러고는 코끼리의 코만 만지고 이것은 뱀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는 소경처럼 으스댔을 것이다.


 관심(關心)에 의한 관심법(觀心法)인가. 이제는 눈썹의 움직이는 결만 봐도 나는 알 것 같다. 인퓨전 펌프에 버드나무 가지처럼 널려 있는 수액 라인의 꼬임만 봐도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투약 스케줄 위로 하나라도 동선을 줄여보려 애를 쓴다. 어찌하여 이런 욕창이 발생하였으며 적절한 드레싱은 무엇이 있을지, 또한 어떤 자세가 치유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환자가 그나마 편안해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염려한다. 그렇게 얻어진 정보를 다음 간호사에게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자극해서 잊지 않게 할 수 있을지도 생각해본다. 모든 것에 표준화된 간호행위가 있지만 무조건적인 적용은 결코 옳지 않다. 질병코드와 병상 자리로 구분되는 환자가 아니라 당장 숨쉬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먼저다. 맞는 방법이 분명히 있다. 비용이 더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누군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운 좋게도 트리거가 있었다. 그래서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을 뿐이다. 


저 멀리 벤트가 울린다. 카랑카랑하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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