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상수입니다
‘행복’이란 시간은 따로 저장해 놓은 총량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참고, 더 견디고, 더 인내하면서 ‘더더더’를 가슴팍에 품어야 한다는 각주를 간직하고 살았다. 종종 물음표가 느낌표를 압도했지만, 언젠가는 ‘행복’이란 감탄사가 즐비하게 찾아오리라 믿었다. 그렇게 거의 50년을 보내면서 느낀 점은, 별도의 ‘행복’이란 총량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그렇지 않은가. 살아보니 절대 그런 시간은 없다는 것. 잠시 스쳐가는 바람과도 같다는 것. 잡으려고 해도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요망한 것이란 걸.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고통과 슬픔을 대동한 빌런들이 들이닥친다는 사실을.
행복학 개론에 따르면, 매사 낙천적이고 호기심 많은 사람은 ‘행복’의 유효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변화가 다반사인 일상을 끌어안고 사는 범인이라면, 이런 ‘행복’은 오다가도 발길을 되돌린다. (이런 발칙한것 같으니.)
때문에 우리는 그런 오지도 않고 마냥 똬리를 틀고 있지도 않을 파랑새 같은 ‘행복’을 좇기보다는, 견디는 시간을 지혜롭게 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하지 않을까.
첫째는 마음의 유격을 넓히는 일이다. 변수를 디폴트 값으로 두되, 심장에서 움찔거리는 변수에 절대 낯설어하지 말자. 변수는 상수로 삼되, 이 변수가 삶의 재미를 추동하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자. 직장에 가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수시로 노크한다. 생각지도 못한 가외 업무, 갑작스러운 미팅, 데드라인 변경 등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꾸역꾸역 업을 삼키지만, 일상의 상수를 디폴트 값으로 두지 않고 변수를 염두한다면, 심적으로 조금은 속이 편하지 않을까.
둘째는 견딤이 마냥 고통스럽지 않다는 자기 주문을 하자. 어떤 환경이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가치를 채워가느냐에 따라, 그 견딤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치환될 수 있다. 아무리 싫은 상사도 3년이면 바뀌기 마련이고, 낯선 업무도 익숙함을 넘어 프로 일잘러로 진화할 수 있다. 일체유심조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견딤을 즐거움으로 밀어 올리기까지 지난한 과정은 겪겠지만, 한층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셋째는 고통과 마주하는 중간중간에 작은 즐거움을 끼워 넣자. 잔잔한 울림이 모이면 어느덧 단단한 울림으로 반향의 크기를 키울 수 있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야말로 오히려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한다면, 우리가 동경하는 세계가 멀리 있지 않다는 보편적 진리를 획득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소확행과 미니멀리즘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지만, 소소한 재미를 진심으로 느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삶의 만족도는 확연히 차이날 수밖에 없다.
견딤은 일상이다. 그 견딤 이후의 달콤한 디저트를 욕망하기보다는, 삶의 고통, 슬픔, 분노, 짜증 등 메인 디쉬에 감사와 기쁨, 웃음, 배려의 양념을 버무리며, 맛깔난 인생을 요리하는 것이 어떨까. 뜬구름과 신기루에 취해, “이번만 넘어가면 우리는 만사형통일 것”이란 감언이설로 꼬드김을 행하는 사람은 일단 거르는 것이 어떨까.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것,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 여기에 강한 확신이 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