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생각 노트
책의 앞부분에서 훌쩍 중간을 건너뛰어, 책의 맨 마지막 뒷부분을 읽고는 이제사 다시 중간 내용을 읽으려 되돌아온다. 사실 역사 이야기는 지루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알아듣기 힘들며 기억하기도 수월찮은 과거 역사 유물, 유적지와 왕의 이름들이 줄줄이 나오면, 어느 틈에 깜박 졸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중간 상당한 분량의 내용 읽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정상 경로가 아닌 지름길로 마지막 부분으로 갔던 것이다. 그래놓고는 이제 길을 되돌아가서 아직 가보지 않은 중간 길을 탐험해 보기로 한다.
여기서 유발 하라리는 수렵채집 시기와 농업혁명을 거쳐서, 문화, 제국, 언어와 숫자, 돈, 종교 등의 주제를 탐구하고 있다. 처음에 수렵채집 시기와 농업혁명 시대를 이야기하기에 이제부터 시간 순, 연대기별로 이야기가 흘러가냐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저자가 중요하게 바라본 키워드, 각 주제별로 예를 들어 제국, 언어와 숫자, 돈, 종교라는 프리즘으로 인류 역사 흐름을 크고 넓게 들여다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 보다 우월한 힘으로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는 있지도 않은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들에 대해 인간 상호 간에 소통, 공유, 협력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여기서 허구는 국가, 언어와 숫자, 화폐, 종교, 정치, 문화 등을 이야기한다. 이것들을 각 챕터별로 명쾌하게 분석하고 해석하여 소개할만한 능력이 내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나로서는 그것보다는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이나 주장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우리는 통상 "제국"이라면 부정적인 인식부터하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관찰해 보면 실제로는 제국이 건설되었을 때가 그러지 않은 시기 - 개별 민족이나 나라로 세분화된 시기 - 보다 제국이 점령한 지역의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문화와 두루 통용되는 법, 규칙, 통화 등이 만들어져서 - 물론 그 과정에서 잔인한 침략과 정복 과정이 있었지만 - 비교해 보면 오히려 문화나 문명이 더욱 발전했고 안정감 있었던 시기로 보인다는 해석이다. 이건 좀 논쟁과 토론, 반박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런 관점이라면, 각 민족이 자신들의 독립 국가를 따로 형성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제국의 통치 아래에 놓이는 상황이 어쩌면 더 평화롭고 융성할 수 있는 것처럼 비춰진다. 대략 이렇게 논리가 흘러가 버리는 것 같다. 물론, 뒷장을 읽어보니 앞서 언급한 내용과 균형을 잡기 위해서일까 모르겠지만, 과거 제국들이 저지른 각종 비인간적인 행위와 사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역사학자이지 않은가. 무슨 뜻으로 위와 같은 논지를 펼쳤는지 의아해진다. 책에서 밝힌 내용대로 역사를 훑어보니 통상의 생각과 달리 그러하더라라는 것을 드러내 알려주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이외의 다른 숨은 뜻이 있는 것일지. 그래도, 간혹 어떤 연구나 주장이 논쟁과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주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이렇게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또는 통상 그러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상식적이라고 고정되어 있던 생각을 흔들어주는 주장이 그렇다.
"제국" 뿐 아니라 "언어와 숫자, 화폐, 종교"에 대해서도 과거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보편적인 관점에 대비하여 조금씩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 물론 조금 다른 측면으로 바라보고 해석한 것이 전부 유발 하라리만의 독창적인 관점은 아닐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사피엔스』 뒷장에 열거된 참고문헌 목록을 보다 보면, 『사피엔스』에서 자주 보이는 저자 나름의 자기주장이 순수하게 그 자신만의 독창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다른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저서에서 언급되었던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가 문화, 제국, 언어와 숫자, 돈, 종교 등. 이 모든 분야를 제각각 깊게 파고들어 집중 연구하기는 불가능했을 것 같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파고들었던 저서들을 읽고, 그 내용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폭넓게 엮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내가 이 책을 맘 잡고 읽기로 한 동기로 되돌아가 보았다. 초등학생들도 읽기 시작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내가 초등학생들의 독서 능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이 책 저자의 관점이나 주장이 보편적으로 우리가 익혔던 인류와 역사에 대한 생각 - 또는 아마 기존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편견,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 상당 부분에 대하여 조금 더 다르게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할 것 같다. 논란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은 것들이다. 그래서 다른 역사책이나 관련 서적에 앞서서 - 내가 너무 앞서서 우려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 자칫 이 책을 처음 읽는 이들이 저자가 제시한 주장이 무슨 정답처럼 받아들이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이건 순전히 개인 취향일 수 있는데, 간혹 책을 읽다 보면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 보다 그 주변을 형성하는 부수적인 이야기, 그런데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 사건 이야기에 더 흥미가 가고 기억에 담아두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원래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로 진출했다면,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대서양으로 진출했고 북미에 뉴암스테르담이란 식민지를 만들었는데, 그만 영국인들에게 뺏기는 바람에 그 이름이 뉴욕으로 바뀌었고, 이 서인도회사가 영국과 싸우느라고 만들었던 성벽 wall 폐허 위에 깐 도로가 월스트리트 Wall Street가 되었다라든가. 또는 18세기 초, 루이 15세 치세, 파리 주식시장에서 미국 미시시피 연안 개발 주식 광풍과 폭락 - 당초 가격 대비 200배까지 폭등했다가 실제 사업성이 없는 사기에 가까운 허상이었음이 밝혀져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던 - 으로 인해 프랑스 정부 재정까지 붕괴되는 바람에, 결국 이 여파가 다음 국왕 루이 16세 파산과 대혁명을 촉발시킨 원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대개 본문 핵심 주제 보다 더 잘 읽히고 기억에 잘 남는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어보면 저자가 인류에 대해 적지 아니 비판적이며,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류가 만들어낸 현재까지의 문명 발전에 대해 한편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실상 인간이 문명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인간 자신 이외에 또는 인간 자신들 간에를 포함하여, 지구에 살고 있는 동식물과 생태계에게 그동안 끼친 해악을 고려해 보면, 또한 현재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창조와 파괴의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전히 가야 할 방향이나 목적을 모른 채, 무책임하고 불만족하는 신이 되어가는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유발 하라리의 이 지극히 타당한 지적과 결론에 대하여 나로서는 그래도 인간에게 밝고 긍정적인 점도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고 싶기도 하고 또 하나는 이 책을 중학생 대상 권장도서 목록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보지만, 초등학생에게 읽히기에 적정할지는 조금 의문이다. 우선 초등학생에게는 다른 기본 역사서들을 읽어보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는 초등학생들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는다는 것은 초등학생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그 부모들의 욕구가 투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아이들과 경쟁해서 그 다른 아이들을 압도해야만 하는 내 아이의 지적 선행 학습을 강화하고자 하는 부모들의 그런 욕망말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빨라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정도에서 읽을까 말까 한 책을 우리 아이에게는 초등학생 시절에 먼저 학습시키고 싶어 하는 지금 이 시대 학부모들의 우리 아이 선진 인류 만들기를 위한 뜨거운 열망으로 형성된 문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다. 역사학자의 질문이라기보다 철학자의 질문처럼 여겨진다. 여기서 좀 더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행복에 대한 부디즘(불교)과 과학의 관점을 상호 비교하면서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디즘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은 행복을 즐거운 느낌과 동일시하는데 실상 즐거운 느낌은 매 순간 계속 변화하고 사라지고 있기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이 덧없는 항상 사라지는 즐거운 느낌을 잡으려고 안달복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이 덧없는 즐거운 느낌을 추구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이 느낌이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명상이다. 명상을 통해서 나의 몸과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고, 나의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이뤄지는지를 깨닫고, 즐거운 느낌을 추구함을 멈추면, 우리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깨끗해지고 만족해질 것이다. 개별 느낌에 대한 추구를 멈춘다면,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출발 인식은 부디즘과 거의 비슷한데 해결 방안은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즉, 행복이나 쾌락을 느끼는 것은 각 개인 인간 뇌의 생화학적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 생화학적 시스템만 잘 개조, 조정하면 지속적인 행복이나 쾌락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이 현대 과학기술이 마련하고 있는 방법으로 더 의존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대략 그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나 자신의 개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행복이라는 것과 즐거운 느낌, 또는 쾌감이나 쾌락을 동일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즐거운 느낌, 쾌감, 쾌락이 모여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겠으나 인간은 기묘한 존재라서 즐거운 느낌, 쾌감, 쾌락이 계속되는대도 이것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반대로, 저자가 예를 들었듯이 우리는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 이루어지는 노동과 수고에 대해 힘들어하고 귀찮아한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힘들고 하기 싫고 귀찮은 번거로운 일이라면 행복하지 않아야 마땅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관련하여, 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유명한 소설가가 평생의 걸작인 대하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매일매일 오로지 앉아서 집필에만 전념하다 보니 몸이 안 좋아지고 병환이 들어서 결국 또래 평균 나이의 기대 수명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요절한 것이다. 그렇게 작업 과정에서 갖은 질병과 노동의 고통에 시달렸는데, 그렇다고 자신의 바라던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낸 그의 인생에 대해 행복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는 자신이 스스로에게 꼭 운명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기에 그 누구보다 행복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무병장수를 위해 그 대하소설 집필을 하지 않고 아무 특별한 목적도 없는 평이하고 평온한 일상을 매일 보내며 살았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전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편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간절히 하고 싶었던 혹은 해야만 했던 집필을 하지 않았기에 마음은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외면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고통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끝으로 저자는 신인류 창조와 영생을 주제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와 길가메시 이야기를 꺼낸다. 우선,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는 새로운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려다 결국 괴물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인데, 저자는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앞으로 현재 인류와는 다른, 현재 인류 보다 더 뛰어난 지능의, 사이보그 인간 또는 인공 생명체가 출현하여 결국 지금 지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생 인류는 소멸하고 미래 지구의 주인은 사이보그 인간 또는 인공 생명체인 신인류가 될 수 있다고 가능성을 높게 언급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기술 발전의 힘입어 전혀 다른 종류의 존재로 업그레이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길가메시 프로젝트와 연결된다. 과학자들이 게놈을 연구하고,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구하는 것에 대해 왜 연구하냐고 물어보면 십중 팔구는 병을 치료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그와 같은 연구와 실험과 기술 발전을 통해 신약을 개발하고 아픈 이들을 치료해 줄 것이다. 저자 역시 질병, 난치병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아픈 이들이 치료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궁극적인 목표는 길가메시 프로젝트의 의도가 숨어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고대 수메르 길가메시 왕은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획득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그처럼 현재 현대 과학기술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는 실제로는 인간의 불멸,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 아닌가? 또 한 가지는 자연발생이나 진화에 기인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인공적으로 생명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영원히 죽지 않는 삶과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것. 오랫동안 인간이 범접할 수 없고 감히 침범할 수 없었던 영역, 신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점차 이 두 가지 일이 현실에서 구현될지도 모를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사람들에게 유난히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통찰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유발 하라리의 관점은 인류에 대해 꽤 비판적이고 비낙관적이다. 수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인류는 종교, 도시와 문명, 정치와 화폐, 금융제도를 만들고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다른 동식물이나 생태계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인류는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으면서, 또 앞으로 일어날 결과들에 대해 -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결과들은 대개 부정적인 결과들이다 - 무책임하면서 만족할 줄도 모르기 있기에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언하건대, 인간은 신이 된 동물이라고 마무리 짓는다. 이 마무리 언급이 저자의 다음 책 『호모 데우스 』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유발 하라리의 관점에 십분 동의하더라도 딱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정확히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저자의 설명처럼 현재 인류 스스로 생명공학,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을 더욱 고도화시켜 영원히 죽지 않는 삶과 현생 인류보다 뛰어난 새로운 생명체 만들기를 멈추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려를 표하고 있지만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과학기술로 노화를 방지하고, 젊음을 되살리고, 더 나아가 영생을 추구한다고 하면, 또 인공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겠다고 하면 단지 종교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 인간성과 도덕성 상실 등 비난과 비판,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소리가 그다지 큰 울림으로 들리지는 않는 것 같다. 어느 틈엔가 과학기술이 쏟아낸 우리 인간의 혼을 쏙 빼놓는 축복의 물폭탄에 우리의 뇌와 마음은 흠뻑 젖어버린 것 같다. 물론, 당연하게도 나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