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 겨울밤 느릿하게 읽어가기

설국

by 지훈

『설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하면. 분명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설국』도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전에 제목만 가지고 내 나름의 이런저런 공상과 상상을 꾸며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쉽게도 또는 다행히도, 지금은 『설국』을 읽기 전에 내가 『설국』이라는 제목으로 어떤 공상을 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설국』을 읽고 있는, 지금 대략 절반 정도 읽었는데, 읽어 나가고 있다 보니 거기에 내 생각과 감정이 어느 정도 빠져있는 상태라서, 막상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어떤 공상과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지워져 버린 것 같다. 당초에는 이 글을 쓰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기 전에 책 제목인 『설국』만으로 만들어낸 나만의 엉뚱한 『설국』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관계로 그 점을 언급할 수 없음이 아쉽지만 넘어가려고 한다.




다만, 『설국』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이미 읽은 지인과 잠깐 이 책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고 있었는데 나의 망설임을 눈치채고는, 그는 내게 적극 이 책의 독서를 추천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막상 이 책의 이야기는 별개 없다고 했다. 무슨 뜻일까 싶었는데. 어떤 남자가 눈 오는 어떤 고장에 가서 어떤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러 오고 그러다가 끝나는 대략 그런 이야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뭐 엄청나게 대단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는 취지로 그렇게 이야기해 준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인은 웬만한 문학이나 예술, 철학 서적은 거의 독파했을 정도로 상당한 식견이 있는 분이므로 『설국』을 폄하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보다는 아마도 노벨 문학상, 가와바타 야스나리 그런 명칭들에 부담을 느껴, 내가 책 읽기를 지레 겁먹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소위 약간 내 마음의 허들을 낮춰주려고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이야기를 해준 것 같았다.


그런데, 지인의 그런 설명은 나로 하여금 예전에 읽었던 어떤 한국 작가의 어떤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연상시켰다. 안개가 자주 자욱하게 끼는 어느 지역 마을에 어떤 일로 방문하게 된 어떤 남자가 그곳에서 어떤 여자를, 소설 속에서는 교사인데, 만나고 서로 연정을 갖다가 결국 헤어져서 남자는 서울로 올라온다. 대략 그런 줄거리였다. 국내 문학사에서 꽤 유명한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내가 청소년기였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작가의 문학적 표현이나 문체 이런 것 때문이 아니라, 소설 속의 남자는 아내가 있었고, 여자는 미혼이라는 설정 때문이었다. 청소년기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인물들 간의 그런 관계에 대해 당시에는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왜 그 소설이 국내 문학사와 평론가, 작가,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작품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국을 펼쳐 읽으면서 다시금 깨달은 것은 소설 읽기의 진짜 재미는 줄거리 파악하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소설의 줄거리를 알고 싶으면 매우 잘 요약 정리된 각종 책소개 블로그, 유튜버, 요약본을 뚝딱 훑어보면 될 일이다. 그리고 굳이 줄거리만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아내가 있는 남자는 눈 덮인 마을에 기차를 타고 도착한다. 마을에서 게이샤인 여자를 만나고 떠났다가 다시 또 그 여자를 만나러 온다. 그 여자는 약혼할 뻔한 남자가 있지만 이와 별도로 또 5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도 있다. 그런데, 이 아내가 있는 남자는 기차를 타고 올 때 기차 안에서 우연히 본 이 마을에 사는 또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등등. 이런 식으로 줄거리로 요약하다 보면 딱 치정 드라마 분위기로 이해될 것 같고, 또 흔하게 그와 같은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어디선가 갑자기 이 남자의 아내가 등장해 느닷없이 김치 싸대기를 후려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해질 것 같다. 이렇게 줄거리를 요약해서 말하려고 하다 보면 되려, 내 마음에서 "막상 내가 설명하고 싶었던 것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특히 이와 같은 소설은 위와 같이 줄거리를 파악하려고 후다닥 읽어가는 것이 아니라 왠지 느릿하게 읽어야 할 것 같다. 줄거리에 집착하기보다는, 겨울밤이라는 계절에 맞추어, 느릿느릿하게 한 문장씩 음미하면서 읽어감이 적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처음 시작 문장부터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두고두고 여기저기에서 자주 인용된다. 나도 소설을 읽기 훨씬 전부터 이 책의 첫 문장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너무 반복되어 소개되다 보니 지금은 오히려 처음, 최초로 이 문장만을 접했을 때 받았던 깊은 첫인상에 대비하여 그 감흥이 좀 옅어진 기분이다.


그리고 별 기대 없이 다음 쪽을 넘겼는데. 어두운 밤에 기차 안에서 기차 창에 비친 바깥 풍경과 기차 실내 풍경, 실내에 어떤 남자와 여자가 있다. 기차 창문에 여자의 얼굴과 바깥 겨울밤 풍경이 서로 겹쳐서 어우러지는 장면을 아주 세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장면 묘사는 사실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는데. 내 경우는 아주 재밌게 흥미롭게 읽혔다. 왜냐하면 나도 가끔 기차를 이용할 경우 이처럼 유리창에 바깥 풍경과 반대편 좌석에 앉은 사람이 겹쳐 보일 때, 그런 경험을 할 때 이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이나 상상이 굴러 다니기 때문이다. 보통은 나중에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상상을 했는지 모두 잊어버리고 그 시점의 경험까지도 깡그리 잊어버리지만 다만 그때 그와 같은 경험을 했었던 것 같다는 정도만 희미하게 남는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그때 겪었던 그 경험을 설명하고 묘사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데, 이 책에서 밤기차 창문에 어린 바깥 풍경과 기차 안 실내의 어떤 여자의 얼굴이 겹쳐져서,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아주 세밀하고 정갈하게 촘촘히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 풍경 묘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이 남자 주인공이 그 기차 창문에 어른거린 여자에 대해 모종의 감정을 갖게 됨을, 그리고 거기에 더해 남자 주인공과 여자 사이에 아주 미묘한 심리적 긴장감이 발생됨을 느낄 수 있다. 그 사소해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묘사할 수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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