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김정아 옮김
영국 감독 에메랄드 페넬의 영화 『폭풍의 언덕』을 보고 왔다. 항상 『폭풍의 언덕』제목을 들으면, 원작자인 에밀리 브론테,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의 이름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청소년기에 이 책을 읽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메랄드 페넬 감독도 10대 시절 이 책을 읽고 강렬한 감흥을 경험했다고 했다. 아마 감수성 높은 시절의 독서 경험이 자신만의 영화를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 같다. 내 경우는 『폭풍의 언덕』을 읽기 전에 스토리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세계 명작으로 그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또 늘 『폭풍의 언덕』하면 자연스럽게 남자 주인공 "히스클리프"가 따라서 연상되었기에,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이 작품이 두 청춘 남녀의 달콤한 로맨스 사랑이야기일 것이며 결국 두 주인공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정도로 줄거리를 내 나름대로 예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10대 소년다운 상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기대감으로 책장을 몇 장 펼쳐서 읽어 나가자마자 완전히 내 상상은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나 버렸다.
지금은 책 내용이 기억에서 가물가물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후유증이 있었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울하고 우울하고, 폭력적이고 비탄에 가득 찬 분위기였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거센 바람과 폭풍이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먹구름이 잔뜩 깔린, 무수한 억새풀 같은 것들이 사방 도처에서 바람에 꺾여 휘몰아치는 황량하고 살벌한 풍경이었다. 그 바람에, 내가 잘 몰랐기도 했지만 심지어 책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히스"라는 진달래꽃 종류의 분홍색 꽃을 칙칙한 색상으로 언덕 사방에 펼쳐져있는 갈대나 잡풀로 잘못 오해하여 오랫동안 기억했었던 것 같다. 히스클리프의 이름 조차도 히스꽃이 피어있는 클리프(절벽)인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작가는 참 친절하게도 제목에서부터 "폭풍"이라는 말을 드러내놓고 써놓아서 독자가 책장을 펼치기 전에 충분히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짐작하도록 암시를 해주었던 것 같다. 작가의 그와 같은 친절함을 독자로서의 내가 무지하여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친 듯이 폭풍과 바람이 휘몰아칠 것임을, 또 구석구석 그런 내용으로 채워질 것임을 제목 『폭풍의 언덕』에서 버젓이 당당하게 드러내놓았는데 말이다. 만약에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상상했던 곱디고운 남녀 간의 낭만적이고 순탄하기만 한 사랑 이야기로만 흘러갈 것이었더라면 아마도『순풍의 평야』정도로 제목을 지었을 것 같기도 하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잿빛 하늘, 회색빛 배경 아래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금은 히스클리프 밖에는 다른 인물들의 이름은 기억나지도 않지만 대개의 인물들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으며, 서로에 대해 적대감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가정 내에서 폭력이 일상으로 난무했던 것만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었다. 가정 내에서 그렇게 폭행과 폭력이 난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책을 읽어 나가면서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과거 10대 시절 내가 읽었던 책에서의 인상과 비교했을 때는, 그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폭력이 묘사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책을 읽기 전에도 그렇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결국 기억에 남는 이름은 "히스클리프" 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에 본 에메랄드 페넬의 영화 『폭풍의 언덕』에서는 히스클리프 역할 남자 배우보다는 캐서린 역할 여자 배우(마고 로비)가 더 생생하게 머리에 남아있었다. 이 점이 가장 의아했다. 내가 책을 잘못 읽었었던 것일까. 책을 읽고 난 후 지금까지도 히스클리프 이름만 기억에 남아있는데, 이번에 영화를 보고서야 아! 여자 주인공이 캐서린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아무튼, 영화는 여자 주인공 캐서린(마고 로비)의 시선과 입장, 감정을 따라 주로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가장 머릿속에 많이 남아있는 것은 결국 여주인공 캐서린을 연기한 여자 배우(마고 로비)의 얼굴, 여러 가지 감정으로 폭발하는 표정과 눈이다. 이야기 자체가 여주인공 캐서린 중심으로 흘러가기도 하려니와 스크린에서 보이는 것은 시시각각, 그때그때 캐서린의 변화하는 감정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어째 캐서린이 이웃집 갑부 린턴가의 며느리가 되어서 거기서 누리는 일상 풍경이 화려하게 펼쳐질 때, 칼라풀한 그림책의 한 장 한 장이 휙휙 펼쳐 지나가듯 지나갈 때, 왠지 그것이 이 여주인공 캐서린 그리고 캐서린을 연기한 여자 배우(마고 로비)에게 딱 맞춤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모르겠다. 더 나아가 이 장면에서는 과거 이 배우(마고 로비)가 바비 인형 실사판 영화에 출연했던 장면들이 느낌상 겹쳐 보이기도 했다.
히스클리프가 매력적이기 보다도, 조금 더 심하게 언급하자면 주인공 캐서린(마고 로비)이 어떤 시선과 감정으로 보느냐에 따라 히스클리프의 존재 의미가 결정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로서는 감정이입이 히스클리프 보다는 되려 캐서린에게 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서는 전반적으로 여자 주인공 캐서린을 비롯해서 여자 등장인물들이 주체적이며 주도적이며 자기주장과 의견을 강력하게 펼친다. 능동적이며 적극적이다. 그에 비해 남자 등장인물들은 비교적 보조적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히스클리프 역할 배우의 인상은 내가 느끼기에는,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순하고 부드럽고 선량해 보였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은 본래 이 배우의 얼굴이 선량하게 보이는 생김으로 인해 원래 히스클리프가 가져야 할 거친 야성미와 마성이 충분히 표현된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아쉬웠다. 몸을 사리지 않는 몰입 연기에도 불구하고 히스클리프의 난폭한 성격과는 어울리지는 않아 보였다.
분명 음울하고 암울하면서도 격정적이고 뜨거운 내용인데,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머릿속에 화려한 이미지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보통 영화를 보고 나면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영화 속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도박으로 전재산을 탕진해 버린 아버지로 인해 가난에 찌들어진, 잔혹하고 비루하고 처참한 "폭풍의 언덕" 집안 곳곳의 황량한 이미지들과 캐서린이 결혼하여 누리는 이웃집 갑부 린턴 집안에서의 밝고 화려한, 선물과 재물이 넘쳐흐르는 이미지들이 서로 비교되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개인적으로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안개 자욱한 돌기둥 사이에서 다시 재회하는 장면도 강렬한 음악과 더불어 인상적으로 남는데. 그래서 간혹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어떤 부분들은 음악과 비주얼 뛰어난 장면들로 인해 음악영화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캐서린 입장에서의 가감없는 뜨거운 욕망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잊을만하면 반복해서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정사 장면들. 에로틱하거나 또는 아름답다기보다는 결국은 두 사람이 맞이하게 될 비참할 결말이 예견되기 때문에, 그 장면들은 오히려 집착과 넘쳐흐르는 정념으로 이해되었다. 이 앞뒤 가리지 않는 두 사람의 무절제한 정사 장면들은 되려 뒤이어서 어떤 식의 응징과 비극이 뒤따라 나올지에 두려워져서 긴장감으로 심장이 쫄깃해진다. 그리고 가만히 보다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격정적인 사랑이라는 생각보다 - 처음에는 그런 격정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 그보다는 그냥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서로에 대한, 또는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힌 것 아닌가 싶기도 해 보였다. 그래서 관객 입장에서는 두 인물에 감정이입 몰입되려고 해도 가끔 튕겨 나와서 제삼자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고 불편한 감정까지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나와 같은 관객이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것을, 그것마저도 감독이 의도하고 설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책을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