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김정아 옮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두 인물의 극단적이고, 흔히들 묘사하듯 광기와 집착 어린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두 인물의 감정에 그저 이입되기는 어렵다. 일정 부분 수긍과 공감의 감정이 형성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멀찍이 뒷걸음치게 되며, 오히려 이건 시대착오적인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도 대차대조를 해보는 지금 시기의 일반 상식과 논리로는 이해가 안될만한 극단적이기만 한 사랑 이야기를 보아야 할 만한 이유는? 모든 것을 데이터에 기반한 효율적인 판단과 성과 지향으로 나아가는 현실에서 내가 경험하기 힘든 또는 주변에서도 이야기 듣기 힘든, 터무니없어 보이는, 절대 있을 수 없어 보이는 사랑과 정염의 이야기에 푹 빠져보는 것이라고. 마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또는 그들 주인공들 곁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감정 경험을 해보는 것이라고. 어떤 영화평에 그렇게 묘사되어 있었다. 동의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휘몰아치며 격돌하는 그들의 감정 자체에 완전히 몰입하여 일상에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니, 에밀리 브론테가 살았던 시절은 빅토리아 시대(1837~1901)인데 그 당시 매우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양갓집 소녀와 길거리 출신 하인인 소년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기도 어려웠을 것 같고, 설혹 다소간 우정이 있었다 해도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시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당시 시점에서 바라봤을 때 이 소설은 매우 시대착오적이었을 것 같다.
10대 시절에 읽었다가 지금 두 번째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폭풍의 언덕』.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 너무나 폭력적이고 황량한 풍경과 상황, 인물들 때문에 감수성에 큰 상처를 입었기에 이후 다시 읽게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번에 영화를 보고 나서 책과 비교해서 다시 읽어볼 마음이 생겼고. 특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작 훼손이라고 영화를 비판하였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책 내용이 기억에 가물했고, 영화를 보내 내내 내가 예전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이 저런 내용이었나 싶어서 시종 의아해지기도 했다.
책을 펼치며 첫 장을 읽어보니 우선 번역이 매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은 당시 옛 번역문체였을 것이니 그랬었는지 잘 읽히지도 않았고, 어쩌면 내가 아직 10대 소년이었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려운 문장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어렴풋한 그때 그 기억 때문에 다시 이 책을 펼치기를 주저했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순탄하게 읽혀나가기 시작했다. 번역가의 역량과 번역의 품질이 향상되었음을 인지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 나 스스로도 이러저러하게 비체계적으로나마 이제 이 책을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지식과 문장이 쌓였을 것 같기도 하다.
대략 5백여 쪽이 넘는 분량인데, 이제 책의 거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 광기, 분노, 집착, 욕망, 복수, 애증, 욕설, 저주, 폭력, 죽음... 책을 읽다 보면 대략 이런 단어들이 계속 떠오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은 히스클리프의 광기와 집착 어린, 치밀한 복수 계획 실행으로 인해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으니까. 캐서린에 대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이라는 것도, 사랑이라기보다는 캐서린에 대한 자기 자신의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욕망 아닌가 싶기도 하다. 캐서린이 자기(히스클리프)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소유하려는 집착 어린 감정 아닌가 싶다. 그것이 사랑일까? 어쩌면 작가는 정곡을 찔렀는지도 모르겠다. 꼭 히스클리프나 캐서린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갖게 될 때는, 그 상대방을 진짜 사랑한다기보다는 그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상태로서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더 많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그런 감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식과 예의 바른 아래에 감춰놓고 있는 온갖 적나라한 감정을 가히 마구마구 넘치도록 흥건하게 묘사하고 드러내놓았으니까.
19세기 영국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써서 책으로 냈다는 것도 놀랄 일이기는 한데, 문제는,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21세기에 읽어도 여전히 충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10대 청소년의 세계 명작 권장 도서여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는데. 굳이 나 개인으로서 그 이유를 찾자면, 평론가들이나 저명한 인사들의 추천사에서는 그 타당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겪게 될 텐데 사전에 10대 시절에 이 책을 읽는다면, 일종의 심리적인 면역 주사처럼, 지독하고 포악한 유형의 인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쓸모 있는 경험으로서가 아닐까 싶다. 또는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마저 병들어 괴롭게 세상을 떠나게 만드는 그런 집착과 광기의 사랑 또는 욕망에는 가급적 휩싸이지 않는 것이 또는 그런 유형의 인물은 만나지 않는 것이 앞날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 『폭풍의 언덕』을 읽어나가는 내내 이 지긋지긋한 집착과 광기, 폭행과 저주와 욕지거리의 이야기는 "히스클리프"가 죽어 나자빠져야지만 끝나겠구나 싶어서 그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에 이르기까지 되었었다고 고백해야겠다. 실제로 '히스클리프'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거의 결말이 매듭지어진다. 책을 읽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어쩌면 "폭풍의 언덕" 사람들에게 일어난 온갖 소문에 귀 기울이고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던, 소문 듣기 좋아하고 소문 퍼뜨리기 즐기는 그런 류의 인근 마을 주민으로서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또는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폭풍의 언덕을 방문하여 이 해괴하고 난폭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방문객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몇 쪽 안 되어 등장한, 중장년이 된 히스클리프는 되는대로 주변 사람들에게 화내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특히 며느리에게 입에 담긴 힘든 욕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장면은, 사실 이 부분은 전혀 기억에는 없는데 - 혹시 청소년기에 읽은 책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 그런 장면을 목도하니까 머리가 얼얼해졌다. 그 이후로도 히스클리프의 포악한 성미는 여러 모로 묘사되고 있다.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는 늘 찌푸리고 험상궂은 벌레씹은 표정의 소년, 히스클리프. 이해는 된다. 주인집 아들에게 허구한 날 두들겨 맞는 폭행과 멸시, 욕설을 바가지로 얻어맞고 당하고 살고 있으니. 폭풍의 언덕 주변에 늘 몰아치는 비바람으로 뒤틀려진 나무들처럼, 심성이 비틀어질 수밖에. 그나마 애정을 주었던 캐서린 마저 현실적인 선택으로 이웃 부잣집 린턴가로 결혼하여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었으니. 멸시, 배반과 분노 이런 감정들이 그를 결국 복수와 증오의 화신으로 만들게 하는데. 그래서 읽어나갈수록 점점 더 켜켜이 찐득하게 쌓이는 복수와 증오와 캐서린에 대한 애증으로 똘똘 뭉친 일그러진 얼굴과 마음의 히스클리프가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이래서 결국은『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를 기억하게 만드는가 보다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 브론테가 왜 굳이 이런 작품을 썼을까? 연보를 찾아보니, 28살에 다른 자매들과 힘을 합쳐, 각자 지은 시들을 모아 필명으로 시집을 자비 출판했는데 단 두 권만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7살에 쓰기 시작한 이 폭풍의 언덕을 29살에 출간했다. 뒤이어 30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첫 출간에서는 그다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다고 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는 히스꽃이 우거진 곳은 바로 에밀리가 살았던 고장이기 때문에 명확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남아있는 증거는 없기 때문에 대개 그것은 작가의 상상일 것이라는 설명들이었다. 자료가 없으니 그렇게 결론 내릴 수도 있겠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김새와 성격이 너무 세밀하고 생생하기에 순전이 그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일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의심이 남는다. 작가가 직접 보고 겪은 인물들이라면 오히려 충분히 납득이 가는데,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기존에 다른 작가들의 책이나 이야기 속에 등장한 누군가를 다시 차용했어야 함이 이해가능한 설명일 것 같다. 그런데, 기존에 다른 작가들의 책에 히스클리프와 유사한 인물이 있어나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남아있는 자료들은 없지만, 에밀리 브론테가 실제 자라면서 보고 겪은 상황과 인물들이 대거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 인물들과 줄거리와는 다소 다르게 벌어졌던 일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라도 내 나름의 추측 결론을 내지 않으면, 굳이 이 작품을 에밀리 브론테가 왜 집필했는지 나 스스로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기 전에 완전히 오해했던 것처럼 로맨스 중심의 이야기를 쓰려는 목적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다고 빅토리아 시대의 신분제에 억압받던 인물들 간의 사랑, 충돌을 그려서 사회의 모순적 구조를 비판하려고 쓰려던 것도 아닌 것 같고, 오직 한 사람(캐서린)만 바라보았던 지고지순한 남자(히스클리프)의 사랑 이야기를 쓰려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엔 사랑으로 시작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오로지 집착과 광기만이, 마치 낡은 뼈다귀처럼 남아버린 남자 이야기일까 모르겠다. 아니면 끝까지 제 버릇 못 고친 집착남(히스클리프) 이야기일지. 왜냐하면 읽고 나면 남는 것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애절한 사랑의 고통 이야기라는 것보다는 히스클리프라는 인물, 이 괴상망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주로라는 것이다. 건장한 체격에 조각 같은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집착과 광기로 똘똘 뭉친 무뚝뚝한 남자. 내 머릿속에 남는 것은 이 인물,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에 대한 생김새, 성격, 행동, 태도, 심리와 언행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끊임없이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하며 위협감을 주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서 내가 이 인물에 흥미를 갖는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선, 캐서린이라는 그 동네 최고로 예쁜 사람과의 애정 관계, 그리고 히스클리프 역시 엄청 잘 생겼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가 결국 엄청난 부자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냥저냥 한 인물에, 끝까지 재산 없는 상태였고, 그 동네 누구와도 별다른 연애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물론 이 이야기 자체가 성립 안되었을 뿐더러 이야기를 읽어볼 동기부여도 상실되었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굳이 이 어둑 침침한 이야기의 흐름을 내 마음대로 조금 바꿔보는 상상을 해본다. 이거야말로 원작 훼손이라고 항의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이의 상상의 자유로움의 영역이므로 그렇게 가본다. 예를 들어, 이 책의 마무리는 오래전에 캐서린과 남편 에드가 린턴이 세상을 떠난 뒤에, 히스클리프도 생을 마감하고, 그다음 세대 아이들인 캐시(캐서린과 남편 에드가 린턴의 딸이면서 히스클리프의 며느리)와 헤어턴(캐서린의 오빠의 아들)이 알콩달콩하며 전체적인 책 분위기와는 다른 이제 뭔가 밝고 따뜻한 미래가 펼쳐질 것 같은 예감으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만약 후속 편이 만들어진다면, 이 둘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이전과는 다른 온화한 분위기에 제대로 찬물을 끼얹을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 필요해 보인다. 이건 좀 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인기는 한데, 인간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평화나 행복이 유지되고 있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거나 깨뜨려지거나 소란이 발생되는 것이 더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며 들떠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우리는 히스클리프가 "폭풍의 언덕"을 떠난 뒤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혹자는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떼돈을 벌었다고 하고 또 군대에 있었다고도 하고. 이 지점에서 나의 상상은 다음과 같이 굴러간다. 만약 그(히스클리프)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어떤 여성을 만났는데 그 사이에 태어난 남자아이가 있다면 그 남자아이가 자라서 청년이 되어 자기 아버지(히스클리프)를 찾아서 영국으로 온다면, 그래서 겨우겨우 찾아냈는데 막상 아버지는 묘비만 남아있고 아버지의 전재산은 아버지의 며느리(캐시)와 그녀와 같이 살고 있는 헤어턴이 독차지하게 된 상황이라면. 그리고 이 청년이 된 히스클리프의 아들이 히스클리프 정도의 단단한 체격과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면. 그래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 이어서 그 다음 세대인 이 히스클리프 아들과 캐시(히스클리프의 며느리) 간에 새로운 묘한 긴장과 호기심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캐시 곁의 헤어턴과는 경쟁과 질투 관계가 형성이 되어 굴러 간다면.
영화가 원작 훼손이라고 언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 아마 히스클리프가 원작에서의 모습 대비하여 영화에서 너무 젠틀하고 부드럽고 비폭력적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 그렇다. 소설에서의 히스클리프는 욕설과 저주와 폭력을 일상으로 달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 보자. 만약 영화에서 그렇게 똑같이 묘사해 버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지금은 적지 않은 독자들이 그렇게 묘사 안 해서 원작에서 너무 멀어졌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만약 감독이 막상 스크린에서 주인공 남자가 여자 주인공 및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거침없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손찌검을 하고 폭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원작 그대로 가감없이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과연 우리 입에서 원작과 동일하게 묘사되어 기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게 되었을까? 오히려, 비록 원작에서는 히스클리프가 그렇게 난폭하더라도 지금 21세기의 현시대 관객들의 문화와 양식에 맞추어 수정하고 새롭게 재현함이 타당할 것이며 오히려 원작 그대로 묘사함이 진정 시대착오적인 연출이라고 목소리 높여 감독의 연출을 비난했을 것 같다. 특히 히스클리프가 여성 등장인물에게 가하는 갖은 욕설과 저주, 폭행을 스크린에서 봐야 했다면 대부분의 관객들이 거부감과 불쾌감, 고통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흥행에도 참패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이들 비판하는 원작에는 없는 선정적인 장면들에 대하여, 나는 그것은 감독의 원작 재해석의 부분이므로 그 자체를 문제시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원작에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두 인물 사이의 육체적인 욕망이나 교류가 묘사되어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영화에서 그려보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에밀리 브론테가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는 가혹한 폭력 묘사 보다 노골적인 성적 묘사를 소설에 드러내는 것이 더 위중한 사회 규범 위반으로 여겨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묘사를 넣었다면 출판 자체가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에밀리 브론테가 꾹 참고 쓰지 못했던 것을 감독이 본인의 해석을 통해 해방시킨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다만, 두 남녀 주연 배우의 몸을 사리지 않는 몰입 연기에도 불구하고,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느낌인데, 그 광기와 집착 어린 지독한 정사 장면에서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 주연배우가 이 여자 주연배우를 정말 사랑할까? 아닐 것 같다는 쪽에 내 머리는 기울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이 여자 주연배우가 이 남자 주연배우를 정말 화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미치도록 사랑할까? 역시 아닐 것 같다는 쪽으로 내 머리는 기울고 있었다. 이런 해석은 정말 나의 잘못된 영화감상법이다. 어차피 배우들은 가상의 인물들을 연기하고, 실제 그 가상의 인물이 배우들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가상의 인물, 영화 속 등장인물과 실제 인간인 배우들을 동일시하면 안 될 것이다. 간혹 영화 속 등장인물과 실제 현실의 배우를 혼동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과 그 등장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구분하지 못하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감상 수준이야말로 딱 나의 영화 보는 감상 레벨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인공들과 이들을 연기한 두 남녀 배우를 실제 그 주인공들이라고 착각해 버린 것이다. 그런 착각에서 두 사람을 보다 보니, 아무리 봐도 이 남자 배우가 이 여자 배우를 화면 속의 히스클리프 정도로 캐서린을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역시 그 여자 배우가 그 남자 배우를 화면 속의 캐서린만큼으로 히스클리프를 욕망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만약 두 남녀 배우가 이 영화 속 화면에서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과 동일한 감정과 마음, 영혼을 갖게 된다면 영화는 더 흥행했을 수 있겠지만 영화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에게 가히 평탄하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반면, 영화를 보는 감상객 입장으로서 나는 조금 아쉬웠다. 이 두 사람이 영화 속 히스클리프와 캐서린만큼 또는 유사하게라도 사랑과 욕망이 서로에게 있었다면, 그것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면 좀 더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연기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조금은 흥이 깨어져 버리면서 갑자기 영화 스크린 바깥으로 튕겨져 나와 원래 내가 앉아있었던 영화관 관객좌석에 착석해 버린 것 같은, 원래 영화와 내가 같이 일체화되어서 굴러가고 있다가 갑작스레 나의 현실인식으로 인해 영화와 내가 다시 이분화되어 동떨어져 분리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