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햄릿

by 지훈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옮긴이 백정국


혼동했다. 헷갈린 것이다. 처음엔 『햄릿』인 줄 알았다. 셰익스피어의 그『햄릿』. 그런데 아니었다. 영화 제목은 『햄릿(Hamlet)』이 아니라 『햄넷(Hamnet)』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아들, 11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이 이야기라고 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어처구니없게도 "햄넷(Hamnet)"이라고 했다. "햄릿"도 아니고 무언가 비스무레하게 읽는 이들을 일순간 혼동하게 만드는 "햄넷"이라니. 조잡하게 지어낸 이야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정도 줄거리만 보고서는 처음에 이 영화가 완전히 허구라고 생각했다. 햄릿을 본 딴 이름의 햄넷을 가진 셰익스피어의 아들 이야기라니. 셰익스피어 이야기로 더 이상 만들어낼 픽션이 없다 보니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찾아보니 완전 허구가 아니었다. 실제였다. 햄릿을 번역한 역자들의 해설을 읽어보니,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아들 이름이 헴넷이었고 그 아들이 11살 경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는 햄릿이라는 이름과 헴넷이라는 이름이 혼용되어 거의 같은 이름으로 쓰였다고 한다. 더구나 아들의 죽음이 나중에 만들어지는 작품 "햄릿"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상당히 근거 있는 추정들을 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알려진 역사적인 사실과 증거가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꽤 탄탄한 그럼직한 토대들 위에 영화 『햄넷(Hamnet)』은 만들어진 것 같았다. 소설 보다 더 소설 같은 실제 이야기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궁금한 김에 『햄넷(Hamnet)』햄넷을 보기로 마음을 정한 다음, 또 바로 셰익스피어『햄릿』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동기로는 공교롭게도 지난번 읽은 『폭풍의 언덕』도, 『폭풍의 언덕』이라는 최근 개봉한 영화를 보고서 책을 읽게 되었으니 이번에 영화 『햄넷(Hamnet)』을 보기로 하고서 『햄릿(Hamlet)』을 읽는 것이 그럭저럭 일관된 영화와 연관된 책 읽기로서 의미가 있어 보였다.


또 한 가지 필연 같은 우연은, 『폭풍의 언덕』이 예전 10대 청소년기에 읽었던 세계 고전이었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세계명작 중에서 요약본이 아닌 전체 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은 아마도 『햄릿』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최초에 『햄릿』을 읽기 전에 익히 들었던 『햄릿』과 관련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셰익스피어", 그리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 "돈은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마라.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 등등의 너무나 유명한 문구들. 그중에서도 단연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문장은 책을 읽기 전부터 수차례 들었던 글귀로서, 기억에 의하면 맨 처음 들었을 때, 그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는 기가 막히게 멋진 문구같이 들렸다. 물론 당연하게도 전후맥락이나 "햄릿"의 내용을 전혀 모른 채, 그 문구만 들었기 때문에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는 전혀 몰랐었다. 그냥 그 문구 자체가 더할 나위 없이 멋들어지게 들렸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문장이 왜 멋있게 들렸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청소년기부터 인생과 존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 의문, 호기심들이 강하게 분출되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내적인 경향과 더불어 당시에 외면적으로는 내 주변에, 가까운 주변에 세상을 떠나는 이들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기에, 죽음, 죽는다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기 어려웠기 때문에 되려 문장 자체가 신비롭고 심오하게 여겨졌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왠지 어마어마하고 깊이 있는 인생의 성찰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충만한 기분으로 두근두근 뛰는 심장으로 책을 펼쳤는데, 웬걸 시작부터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나타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숙부(아버지의 동생)가 덴마크의 왕인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관을 차지하고서는 어머니를 자신의 왕비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부분을 읽으면서.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형제가 아버지를 몰래 살해하고는, 아버지의 부인(어머니)과 다시 결혼한다! 이 기본 설정에 너무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뻔했던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그것이 형제지간에 발생하고, 우발도 아니고 계획적인 의도된 살인이었으며, 더구나 일반인도 아니고 왕족 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형의 아내와 다시 결혼을 한다. 이 기본 상황에 너무 놀라서 사실 그다음에는 읽는 내용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햄릿』을 읽기 전에 많이 들었던 해석은 햄릿형 인간은 사색형, 우유부단하며, 돈키호테형 인간은 몽상가, 행동형 인간이라는 설명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인 내용이기는 한데, 책을 읽어보면서 정말 그러한가 의문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햄릿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지만 마냥 사색만 하고 우유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과 어머니(왕비)와의 대화를 휘장 뒤에 몰래 숨어서 엿듣고 있던 자를 누구인지 휘장을 들쳐 확인하지도 않고 서슴없이 칼로 찔러 천연덕스럽게 살해하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매우 충동적이고 자기감정과 격분에 휘둘리는 인간형으로 보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매우 주도면밀한 측면도 있다. 순찰병들에게 아버지 유령을 만난 사실을 함구하도록 조심시키는가 하면, 숙부의 아버지 살해를 확증하기 위해 유랑극단으로 하여금 유사한 상황을 왕(숙부) 앞에서 공연하게끔 주문하는가 하면, 영국으로 가는 자신의 수행원들이 지니고 있던 왕(숙부)의 친서를 몰래 들춰보고는 필체를 흉내 내어 그 내용을 다시 써서 편지를 바꿔치기하는 대범함도 보인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색만 하거나 우유부단하지도 않았고,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이면서 동시에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대담함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보였다. 사색만 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 칼로 사람을 찌르고,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의 필체를 흉내 내어 편지를 조작하고 (물론, 이 편지에서 왕은 이 편지를 받아보는 이에게 햄릿을 죽일 것을 요청하고 있기에 당연 그럼직하지만), 마지막에는 칼싸움으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힘과 더불어, 왕을 찌르고 왕의 입을 벌려 독극물을 마시게 하는 과격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을까? 내게 있어서, 선입견으로 들었던 권위 있는 어른들이 해석하여 설명해 준 사색형 햄릿과 실제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서 드러난 격한 감정의 햄릿은 분명 달랐다.




그리고 그 문제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나로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보다 이 문장 자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문제였던 것 같다. 이 문장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번역자들이나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대개 번역자나 전문가들은 이 문장에서 셰익스피어 이전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웠던 인간의 존재론적인 성찰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햄릿" 발표 시기가 17세기 초인 1600년~1607년 경이라고 하니까 매우 타당한 해석인 것 같다. 그런데, 청소년기의 나는 그와 같은 해석을 잘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니 물론 지금도 상당히 그러하지만 - "존재론적"이라는 말 자체가 쉽지 않다 -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살해한 숙부 클로디어스가 나 햄릿을 이어서 제거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내가 숙부를 죽이고 살아남느냐(내가 사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숙부가 나를 죽이느냐(내가 죽느냐)하는 절체절명의 문제를 인식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또는 거꾸로 숙부와 나를 도치하여 대입해도 말이 되긴 하지만. 10대 청소년으로서의 내가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해석이 가장 명료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해석으로는 이해할 도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서 이 문장이 어떤 존재론적인 의미, 그러니까 번역자들에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또는 "있음이냐 없음이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 설명을 들으니 나의 첫 해석이 매우 단선적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존재론적 뜻에 무게가 실린 설명을 들으니 오히려 사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사실, 철학자나 문학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쉽사리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다시 읽어보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문장만 따로 뚝 떨어져 놓고 볼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다른 문장들과 같이 읽어봐야 할 일인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들과 같이 읽어보면, 단순하게 복수해서 상대방을 죽이느냐 아니면 내가 죽느냐라는 생각이 아니라 좀 다르게 읽힌다. 번역자들이 설명하듯이 존재-비존재의 인식으로 읽힘이 타당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 부분의 문장들은 햄릿의 전체 흐름과는 다소 동떨어지게 읽히기도 하는데, 그래서 이 부분만 가지고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점이 있어 보인다.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가 11살짜리 아들 햄넷을 잃고는 수년 후에 『햄릿』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올리는 장면이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여기서 위에 그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무대 위의 햄릿 연기를 하는 배우가 내뱉는데, 그전까지는 말이 안 된다고 혹은 셰익스피어의 아들 햄넷과 연극 햄릿, 덴마크 왕자 햄릿이 무슨 관계가 싶었던 것이, 그 배우가 읊는 대사를 듣는 순간. 희한하게도 셰익스피어 아들 햄넷의 죽음, 아들의 삶과 죽음이 영화에서 셰익스피어가 올리는 첫 햄릿 공연에서 나오는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연결되어 명료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전혀 상관없이 보였던 셰익스피어 아들 햄넷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이 그 문장으로 연결되어 뒤섞이고 공명하는 아주 색다르고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었다. 전공자와 전문가들의 어렵고 난해한 용어 제시를 통한 설명 보다 이 영화에서의 그 장면과 대사가 더 명징해 보였다.





청소년기에 『햄릿』을 읽고 난 후에 대체적인 인상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고 침침한 분위기였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침식된 북구 유럽의 고성(古城)이 달빛도 없는 어둠에 깊이 잠겨있다. 온통 먹구름으로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있고 어디선가 깊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대충 그런 이미지가 책을 읽고 난 후에도 계속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세계문학사에 다시없을 명작이라고 해서 잔뜩 기대하고 책을 펼쳤는데, 이건 청소년기의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등장인물의 연속적인 죽음을 맞닥뜨려야 했다. 햄릿의 가족과 햄릿의 연인이었던 오필리어 가족들이 그러했다. 가만히 보니 햄릿을 비롯해서 햄릿의 아버지(과거 왕), 어머니, 숙부(현재 왕)와 오필리어 아버지, 오필리어 자신 그리고 오필리어 오빠에 이르기까지. 두 집안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주검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흔히 비극을 봄으로써 카타르시스(淨化) 경험을 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그 보다 스트레스 경험이 더 심하게 압도했던 것 같다. 더구나 마지막 장면에서 햄릿을 비롯해서 온갖 피투성이 시신들이 바닥에 널려있었으니, 그 가운데에 망연자실 우두커니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햄릿』을 읽고 이 마지막 광경에 질려버렸다. 『햄릿』에서 받은 그 끔찍하고 우울한 인상으로 인해서, 앞으로 내가 읽게 될 세계고전, 세계명작이라는 작품들에서 이에 못지않게, 적지않이 비상식적이고 잔혹하며 당황스러운 인물과 상황들을 또 마주하게 될 것을 어렴풋하게 예감하게 되었다.




한편, 또 이것 역시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햄릿』에서 왜 이렇게 온갖 현란한 언어유희와 욕지거리와 음담패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지. 어질 할 지경이었다. 특히나, 그런 저속한 언사를 다른 이도 아니고 햄릿이라는 주인공이, 더구나 그의 연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오필리어에게 함부로 내뱉는 장면을 보면서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비록 그가 의도적으로 주변인들을 속이기 위해 미친 척을 했다는 그럼직한 근거를 내세웠지만 말이다. 또한, 등장인물들 사이에 수시로 벌어지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앞뒤로 비틀어 꼬여놓은 문장들은 그럴싸한 말이 되었다가 동시에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문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셰익스피어 작품 비평가나 전문가들이 내가 앞서 느낀 감상이 셰익스피어 작품의 본질은 아니다고 지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최초에 햄릿을 읽었을 때 가장 크게 느꼈던 감상과 인상을 그런 것이었으니 그것이 아니었다고 할 도리는 없을 것 같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든 생각인데, 수백 년 전에 쓰인 것이기에 지금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고 언어유희처럼, 무슨 뜻인지 명료하지 않게 난무하는 표현들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는데, 이건 눈으로 읽기 위해 쓰여진 글이 아니라 공연을 위한 대본(희곡)이므로 나처럼 글로써 읽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햄릿』 공연이 상연되면 그것을 보러 가는 것이 더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모두 다 읽고 나서 만약 내가 햄릿이었다면 그런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벽이 너무 높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뜯어본들, 혹은 환생을 해본다고 해도, 과연 내가 덴마크의 왕자가 될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에 대해 가능성이 없다는 쪽으로 머리가 기울어지자 상상과 생각은 더는 앞으로 진전하지 못했다. 이런 내 생각이 과히 엉뚱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왜냐하면 책의 맨 뒤쪽에 유명인사들의 "햄릿"에 대한 언급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현대 셰익스피어 작품 전문 극단 연출가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햄릿을 보편적인 인간의 모델로 읽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이었다. 햄릿은 태생 자체가 덴마크 왕국의 왕자이므로 국제적인 거물급 인사이지 우리와 같은 일개 평민(일반인)들과는 비교 불가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햄릿 이야기의 기본 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 연출가의 언급에 나로서는 전적으로 격하게 공감했다. 최초에 햄릿이라는 이야기를 읽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덴마크의 왕자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니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내가 이 『햄릿』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상상해 보게 되었다. 내용을 바꾼다기보다 다시 읽다 보니 어떤 미심쩍은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앞부분에서 살짝 설명하고는 넘어간 부분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전쟁이 배경이다. 당시 덴마크의 왕(햄릿의 아버지)이 노르웨이와의 전쟁에서 노르웨이 왕(왕자 포틴브라스의 아버지)을 죽이고 승리하여 노르웨이 땅 일부를 점령하게 되었는데, 햄릿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는 선대에서 빼앗긴 그 땅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고 한다. 이것을 현재 왕(햄릿의 숙부)이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 좌절시킨다. 대신,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는 폴란드를 치러 갈 테니 도중에 덴마크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포틴브라스가 덴마크 영토를 지나는 와중에 덴마크 궁정에서 현재 왕(햄릿의 숙부), 왕비(햄릿의 어머니), 햄릿, 오필리어의 오빠가 각자 독을 묻힌 칼에 찔리고 독극물이 든 술을 마시며 떼죽음을 당한 현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에게 햄릿의 절친 호레이쇼는 이 모든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구나 햄릿은 죽어가면서 덴마크를 통치할 왕가의 사람들이 모두 죽어 없어진 상황에서 포틴브라스 왕자가 그러한 역할을 맡음이 적당함을 호레이쇼에게 유언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결국 이 이야기의 진짜 승자는 얼떨결에 과거 덴마크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게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덴마크 통치까지 맡게 된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혹시 이런 전체적인 상황 자체가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가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수년간 면밀하게 설계한 계획에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햄릿의 절친이었다는 호레이쇼에 대해서도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결국 현장에서 주요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호레이쇼였고 호레이쇼만이 왜 이런 상황이 발생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이렇게 결말지어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호레이쇼가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가 몰래 덴마크 왕실에 심어놓은 첩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이 이야기를 다시 재구성해본다면 햄릿의 아버지에게 조국의 영토와 아버지를 잃은 노르웨이 왕자 포틴브라스의 치밀한 복수극으로 끌어가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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