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레브 (2)

국경 검문소였다.

by 지훈

흠칫 놀라서 일어났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였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긴 나무 의자에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둘러보니, 국경 근처의 작은 기차역 대기실 같은 곳이었다.

바닥은 먼지투성이였고. 찌그러진 캔과 구겨진 신문 쪼가리가 바람에 굴러다녔다.




어떻게 된 것이지? 기억을 더듬 보려는 사이에.

얼굴이 가무잡잡한 여자 어른 한 명과 남자 어른 두 명이 들어왔다.

여자는 눈동자가 커다랗고, 다소 억세보이는 인상이었다.

남자 두 명은 진청색의 경관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마 검문소 직원인 것 같았다.

여자는 민간인인 것 같았다. 긴치마에, 때 묻은 점퍼 차림이었다.

여자에 대한 첫인상은 마그레브였다.

아무래도 마그레브에서 온 사람 같았다.


세 사람은 내가 알아듣기 힘든 말로 뭐라고 뭐라고 손짓 발짓해 가며 서로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여자는 여권이나 비자가 없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국경을 넘으려다가 붙잡힌 것 같았다.

한참을 서로 실갱이를 하고 있었고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울그락 푸르락하는 얼굴에 맞추어, 주먹을 불끈 쥐고 두 손바닥을 마주치기까지 했다.

그 기세에 눌려, 검문속 경관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는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검문소 대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은땀이 난다.

왜 갑자기 나를 지목했을까.

여자는 목소리를 더 한층 높여 침을 튀겨가며 두 대원을 설득하려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를 보고 자기 아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뭐! 내가 자기 아들이라고?

이 가무잡잡하고 퉁명스러워보이는, 때 묻은 겨울 점퍼 차림의 여자 어른이

갑자기 나를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자는 다급하게 내 손을 잡아끌더니 내 얼굴을 그 검문소 대원들을 향하게 하고는

내 얼굴에 바로 자기 얼굴을 갖다 대며 비교해 보였다.

우리가 서로 닮은 꼴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몸냄새가 역겨웠다.

그 여자의 옷차림이나 머리 매무새, 얼굴 표정, 손짓, 말투.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아. 그런데 이 여자 어른이 내 손을 끌어당길 때 나는 얼핏 보았다.

내 손의 색깔을.

그리고 이 여자 어른의 손 색깔을.

이럴 수가. 내 손은 까무잡잡했다.

이 여자 어른과 똑같은 피부 색깔이었다.


아니 그럼 어쩌면 내가 이 여자 어른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여기서 당장 해결해야할 다급한 일은 이 검문소를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지체되면 아마 유치장으로 가야 할 지도 모른다.

요란하게 목소리를 높여 자신과 자신의 아들, 아마도 나를 지칭하는 것이겠지, 같이 국경을 넘어가야 한다고 항변하는 이 여자 어른을 잠깐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장황하게 손짓 발짓을 하며, 검문소 대원들에게 국경 너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문소 대원들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때, 그녀는 대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내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나는 흠칫 놀랬다.

어쩌면 이 여자 어른은 나의 진짜 엄마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상관없었다.

나한테나 이 여자 어른에게나 목적은 단 하나.

이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하는 것이다.

눈짓을 통해, 우린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그때부터 이 여자 어른을 나의 엄마인 것처럼, 아니 내가 이 여자 어른의 아들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 여자 어른에게 찰싹 붙어서 눈망울을 순진무구하게 굴려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그 검문소 대원들의 동정을 사기 위해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황당한 꿈을 꾼 며칠 뒤. 정확히는 이틀 뒤에,

새로 들어온 팀원들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한 친구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는 유럽 남부 지역 출신 요리사 이야기를 꺼냈다.

그 지명을 듣자 나는 바로 이틀 전 꿈에서 본 아드리아해 해변가 마을 결혼식이 떠올랐다. 그 지명은 꿈의 내용들을 다시 환기시켰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렀다. 간혹 퇴근하다가 서점을 들러 신간들을 둘러본다.

입구 가판대에서 왠지 눈에 띄는 책 하나 집어 들어 살짝 몇 쪽을 들춰보았다.

외국 작가가 쓴 소설이었다. 책의 주인공은 가난한 빈촌에서 엄마가 아닌 어떤 아주머니의 집에 얹혀 살아가는 소년 이야기였다. 도둑질과 폭력, 사기가 난무하는 동네였다. 소년은 마그레브 출신이었다.




통상의 꿈은 과거의 여러 가지 경험, 기존에 보고 들었던 잡다한 정보들이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있다가, 어느 시점에 뒤섞여서 불현듯 꿈 속에서 이미지나 영상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이상하게 시간의 흐름상, 꿈을 꾼 다음에 그 꿈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키워드들을 미래 시점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그냥 우연이거나 억지로 끼워 맞추기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사전에 꿈에서 경험했던 일과 연관된 말인 "유럽 남부 지역", "마그레브"라는 단어들을 그 꿈을 꾼지 며칠 내로 현실 세계의 다른 이들로부터 듣고 보게 되었으므로 상당히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