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의 이야기
기일은 어제였다.
실은 기일이 어제인지도 언제인지도 몰랐다. 그저 엄마의 말을 듣고 할머니 산소에 따라 나섰을 뿐이다.
그 날은 마침 내가 수원 집에 가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는 아들의 시간을 뺏는게 미안했던 엄마는 할머니 산소에 가야하니 다른 날을 잡아서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멀지 않은 길이지만 엄마는 뭐하러 힘들게 따라오냐며 핀잔이다. 내 속마음도 모르고.
나는 속마음을 이내 감췄다. 엄마 앞에서 티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엄마의 엄마가 보고싶을텐데, 나도 슬퍼하고 있으면 슬픔이 배가 될까 걱정되는 마음에 속마음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회식이 있는 날이었고 못마시는 술을 어렵게 한잔씩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저녁 늦게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화서동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와야한다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화를 끊고나서도 정신은 멀쩡했다. 다음날 장례식장을 가서도 난 무너지지 않았다.
그 곳에 있던 할머니의 아들들과 엄마도 나보다 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고, 나 또한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할머니를 배웅할 것 같았다.
염을 해야하니 가족들은 모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참석하기로 했지만 난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가족 중에 나만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에 난 아무말도 하지 않는 할머니를 보고 싶지 않았다. 생전에 찾아가 얼굴을 보지 못한 미안함과 무너지지 않은 정신을 유지하고 싶던 얄팍한 고집때문에 마지막 할머니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염을 마치고 나온 가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나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러 나갔다.
할머니가 나왔다. 관이 나왔다. 관을 마주했을때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조용히 아무도 없는 구석을 찾아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부터 발인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정신차렸을때 나는 어린 시절 추억의 많은 부분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외할머니는
난 외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이 없다. 철없이 굴던 내가 혼나지 않았을리 없는데 추억의 동굴에는 그런 기억이 없다. 외할머니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와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은 수원 매탄동에 터를 잡고 살고 있었고 외할머니는 화서동에서 살고 계셨다. 작은 가족 행사에도 함께할 수 있는 거리에 있었고, 그래서인지 외할머니와의 접촉은 다른 가족들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나는 초등학생때 명절마다 친가에 가는 우리나라 명절문화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고, 친정에 가고 싶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공감하고 안타까워했다.
외할머니는 천주교 신자셨고, 주말에 성당에 나가실때는 우리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것도 그저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에서 비롯된 할머니의 종교적 성향이었겠지만 그런 외할머니가 친할머니와 달리 참 너그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친구분들과 십원짜리 화투치는걸 좋아하셨고, 옆에서 내가 구경하고 놀아도 재미있게 귀엽게만 생각했다. 심지어 초등학생인 나와 놀아주겠다고 함께 화투를 치곤 했다.
나는 외할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기를 좋아했고, 외할머니는 그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럴 때면 나는 곧잘 잠에 들곤 했다. 집에 외할머니가 온 날이면 난 항상 등을 긁어달라고 했었고, 그것 또한 그보다 더 어렸을때의 추억 중에 하나여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이가 많이 드시고 날이 많이 남지 않으셨을 때는 손에 주름이 많아지셨고 혼자 걷기 힘들어 했고 많이 여위셨다. 그런 외할머니를 엄마는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아빠가 되었고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5개월된 아들을 키우면서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면 엄마는 항상 할머니가 도와줘서 편하게 키웠다고 답하곤 한다. 할머니는 내가 갓난아기일때부터 내 옆에 있었나보다.
외할머니는 담배를 태우셨다.
오늘은 한가지 더 기억을 해냈다. 외할머니는 담배를 태우셨다. 어렸을때 마루에 걸터 앉아 곰방대를 입에 물고 계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 났다.
오늘은 꿈에서라도 꼭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