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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Oct 30. 2023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하나

어떤 상황이든, 짐을 싸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다. 괜히 많이 가져갔다가는 쓸데 없이 많은 짐에 어깨나 아플 뿐이고, 또 부족하게 가져갔다가는 무언가를 사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만 한다.


미국 유학을 위해 떠나올 때, 가장 큰 사이즈의 캐리어 두 개를 사서 그 안에 필요한 것을 꾹꾹 눌러 담았다. 최대 무게를 넘지 않기 위해 짐을 싸고 풀고를 몇 번 반복했다. 처음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그 앞에 '굳이'라는 접두사가 붙기 시작했다. 짐을 싸는 과정은 결국 삶에 필요한 것만을 추리는 과정이고, 귀찮음과 피곤함 앞에서 인간은 꽤나 냉철하게 행동하고는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기는 해서, 현대해운 드림백 서비스를 신청해서 이민 가방 하나를 꽉 채웠다. 비행기로 함께 싣고 갈 수는 없지만, 두 세달 후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할 물건들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고 필요 없는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버리는 과정을 반복했다. 어째 너무 많이 버려버렸는지 공간이 조금 남고 말았다.


그 공간을 책 몇 권으로 채웠다. 짐을 싸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책을 고르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아무래도 미국에서는 한글 활자로 쓰여진 책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테니 그 결정은 꽤나 심사숙고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네 권의 책을 정해 이민가방에 넣었다.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 시노 요코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 이묵돌의 블루노트.


사실 가장 좋아하는 책들도 아니고, 어떤 큰 의미가 있어서 고른 책은 아니었다. 분명히 오랜 고민은 하긴 했지만. 늘 그렇듯이 장고 끝에 악수를 두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어떤 우연에 이끌려 네 권의 책을 담아 이민 가방을 보냈다.


그리고 두 달 반 정도만에 이민가방을 받았다. 당장 필요했던 긴팔 옷이나 외투도 반가웠지만, 나는 그렇게 한글로 된 활자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 구겨진 부분을 꾹꾹 눌러 피며 아주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E-book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 어떤 촉감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굳이 내가 이 책을 골랐는가에 대한 변명을 스스로 했다.


1. 황인숙의 자명한 산책. 내가 최초로 구매했던 시집으로 기억한다. 시를 쓰는 것이야 좋아해도 타인의 시를 읽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어째 다른 글을 읽는 것보다 시를 읽는 것이 더 많은 피곤함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짧은 페이지 속에 여러 주제가 담겨 있다 보니, 시집을 다 읽고 나서도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날 때가 있다. 다만 이 시집을 샀던 유일한 이유는 마음에 드는 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강> 이라는 시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2.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 익명의 누군가가 추천해줘서 읽었던 책이다. 누구인지를 숨기고 싶어서 익명이라 적은 것이 아니고, 정말 익명게시판의 누군가가 추천한 책이다. 사람은 비슷한 상황의 사람에게 정신을 홀딱 빼앗기는 법이고, 그때 나의 정서는 꽤 이 책과 닮아있었기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두 번이나 이 책을 곱씹어 읽었다. 정확히는 한 번 일독하고 반 정도를 다시 읽었는데 카페 문 닫을 시간이 되어 길을 걸으며 읽었다. 집에 와서 마음이 동해 허지웅의 다른 책을 구매했다. 최소한의 이웃이었나. 나는 그날의 색채를 압도적인 실망으로 기억한다.


3. 시노 요코의 친애하는 미스터 최.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 가끔, 내 인생에도 몇 안되는 꽤 대화 코드가 맞는 사람이 생길 때면 편지 쓰는 것을 취미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것이 취미냐고 물으면 어째 대답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편지 받는 것을 좋아해서일까. 친애하는 미스터 최는 시노 요코와 최정호가 나눈 서신들을 엮어 낸 책이다. 서간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재밌으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대중적이면서도 고아하다. 나는 언제 이런 편지를 마음 좋게 내어줄 수 있을까. 아니, 편지라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기는 한가.


4. 이묵돌의 블루 노트. 새내기 때였나, 페이스북에 리뷰왕 김리뷰가 유명했던 적이 있었다. 여러가지를 직접 리뷰하는 와중에도 글이 꽤나 재밌어서 팔로우 해두고 가끔 읽고는 했었다. 김리뷰가 여러 일을 거쳐 지금의 이묵돌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주 큰 우연의 한 일부분이었다. 다른 책들보다 빼어나고 수려한 것은 아니겠지만, 굳이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뭘까. 어렸을 적의 작은 추억을 기억하기 위함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기사 인생에서 내가 확실히 알고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되겠나. 


그렇게, 오늘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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