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피 Aug 21. 2023

어른에게 없는 것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가라앉지 못하고 들뜬 채로 두근거림을 선사하는 날이 있다. 자꾸만 일렁이는 기분 좋은 들먹임. 머리는 온통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기만 기다리게 되는 순간. 여름을 등에 업고 가을이 오기 전 맞이하는 여름방학. 새 학기를 위해 미리 받아야 했던 교과서를 책가방 가득 담고도 다 담지 못했을 땐 남은 손에 들어야 했다. 그렇게 무거운 책더미를 마저 손에 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잔뜩 신이 나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초등학생 때도 토요일까지 학교를 가야 했으니, 방학이 기다려지고 온종일 집에 있을 생각에 신이 안 날 수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방학은 설레게 하다 이내 차츰 지루하게 만들고 조급하게 만든다. 설레는 게 오래갈 것 같지만 방학 내내 집에만 있다 보면 학교생활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난 섬에서 살았으니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한 방학은 그야말로 농사를 하는 집안의 일꾼으로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받은 교과서를 책상 한쪽에 쌓아두며 가끔 들여다보며 새 학기에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단 의지를 불태우다가 이내 몇 쪽을 읽다 지루함에 덮고 말았던 기억. ‘여름방학 숙제’라고 적혀 있는 칸을 보며 제일 빨리 할 수 있는 것과 차일피일 미루게 되던 일기 쓰기. 동그란 계획표 안에 여름방학 동안 지킬 나의 일상생활 규칙 정하기 등 방학하면 생각나는 것들에 나는 어느새 입꼬리를 올리고 웃고 있다. 그땐 그게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지금은 누가 내게 여름방학 숙제라도 내주면 재밌겠다고 상상을 하고 있다.    

  

 방학은 학생만의 특권이다. 학생일 때만 가져볼 수 있는. 삼십 대가 된 지금 방학도 없는 여름을 보내는 나는 내 딸의 ‘어린이집 방학’을 통해, 지인의 ‘초등학교 방학’을 통해서 ‘방학’이라는 정겨운 단어를 오랜만에 가슴에 품어보게 되었다. 그 두 글자가 내게 주었던 모든 감정과 내가 보내왔던 어린 시절의 방학 때의 추억들이 하나둘 깨어나 내 가슴 어딘가를 콕콕 찌른다. 나를 붕 뜨게 하고 나도 모르게 입술 양 끝을 올리게 만들고 ‘그땐 그랬지’라는 말을 꺼내게 만든다. 그러다 이내 현실로 돌아오면 ‘이 죽일 놈의 방학’이 되고 만다. 어른(방학이라는 단어가 존재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방학이 그렇게 스트레스가 되고 만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주어진 게 아닌 것들이 되고 나니 짧은 5일의 어린이집 방학도 한 달처럼 길게 느껴지는 이상한 게 되어 버린다. 나는 ‘겨우’ 5일에 그치지만 나보다 더 큰 아이를 키우는 가정의 엄마들을 생각하노라면 내가 과연 그보다 더 많은 방학일 수를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시작해서 지금을 즐기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리고 방학이 오면 덜컥 겁부터 먹게 되고 만다.      


 어렸을 때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니 하루라도 늦게 어른이 되고 싶어 진다. 아니, 하루라도 나이를 덜 먹고 싶어 진다. 이제 겨우 삼십 대인데 내 몸은 집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은 몸이 되어 버린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러다 문득 나보다 더 나이가 많은 내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다들 어떻게 자신의 육체를 짊어지고 사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다 보면 이내 ‘건강’을 위해 사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방학이 사라졌다. 사라진 건 방학뿐일까? 나는 사라진 게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쓸쓸해진다.      


 누군가의 보살핌도 제지도 없이 오로지 홀로 서서 견뎌내야 하는 외로운 것 투성이인 사이에서 아직도 어린 나이인 내 나이가, 나 자신이, 내 또래가, 보다 위인 모든 이들이. 어쩌면 여전히 우리에게도 울타리가, 학교가, 선생님이, 친구가, 방학이 필요한지 모른다고.      


 그때처럼 숙제가 많다고 투덜대고, 무엇을 하며 보낼지 생각하고, 지키지도 않을 계획표를 만들면서 내 맘대로 보내고 후회했던 방학이 그립다. 길고도 짧은 여름 방학이 끝나면 가라앉아 있던 먼지들이 똑같은 검은색 삼선 슬리퍼에 의해 교실을 이리저리 누비던 때, 교실 한 공간을 소란스럽고도 간질이던 소리들이 자꾸 그리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아르바이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