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취업을 위해 두달간 머물렀던 말레이시아에 대한 추억
동남아 라고 하면 대표적인 여행지인 태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정도만 연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라는 나라는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이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관심이 없던 나라였다. 그러다 싱가포르 해외취업 도전한다고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 한달 살기를 시작하면서 말레이시아와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알고 보니까 말레이시아는 공용어 말레이어 다음으로 영어가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이기 때문에 성인들이 어학연수로 오기도 하고, 저렴한 가격에 국제학교에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조기유학으로 어린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오기도 하고, 아니면 한식당을 오픈해서 사는 분들도 많고, 1억원 이상을 말레이시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은퇴 비자인 MM2H(Malaysia My Second Home)를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은퇴지 로도 각광 받는 곳이었다.
왜 인기가 많을까 혼자서 생각해 봤는데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르게 현지어를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영어로 일상생활이나 관공서 업무 보는데 지장이 없는 점, 무슬림 국가다 보니까 코란 율법에서 음주를 금지하고 있기도 하고 야근이 없어서 일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식사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는데 있어서 건전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점, 그리고 땅 크기는 한국(남한)의 3배 정도인데 인구는 3천만명 수준이기 때문에 넓은 땅에 인구 밀도가 낮기 때문에 평화로운 인상을 주는 것이 말레이시아의 인기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이런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와 원래 한 나라였다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매우 가까운데, 만약 입국심사줄이 막히지만 않는다면 버스로 왕복 2시간 내외로도 다녀올 수 있는 여행지이다. 한국은 분단된 나라이기 때문에 원치 않게 섬처럼 되어버리는 바람에 걸어서 다른 나라에 간다는 개념이 생소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버스를 통한 육로로 국경을 넘는게 마냥 신기했다.
내가 머물렀던 조호바루는 한국으로 치면 부산 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 제2의 수도였다. 애초에 이 도시에 살기로 결정한 건 저렴한 집 렌트 비용 때문이었다. 싱가포르는 서울과 비슷한 물가 수준을 가지고 있지만 집과 자동차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에 매년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 비싼 도시 1위를 다툰다. 그래서 남들과 함께 살면서 집 한 칸을 빌려 사는데도 80만원 정도는 렌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만 바로 옆 도시인 조호바루에서 산다면 30만원으로도 충분히 좋은 집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싱가포르 해외취업에 도전하면서 조호바루에 머물렀던 것이다.
첫 한달은 해외에서 한달 살기를 할 때 유용한 에어비앤비를 통해서 빌렸다. 내가 묵었던 숙소는 고속버스를 탈 수 있는 라킨 센트럴(Larkin Sentral)이라고 버스 터미널과 가까운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에릭이라는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이었는데, 말레이계처럼 턱수염을 기르고 있어서 그런지 중국계 라기 보다는 말레이계 사람 처럼도 보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중국계 라고 소개를 받아도 선조 중에 말레이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은 이국적인 외모의 사람의 종종 있었다. 에릭은 직장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퇴사하고는 작게 자기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기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인 부분에서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부가적으로 에어비앤비로 수입을 올리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말레이시아는 수영장, 헬스장 등 부대시설이 딸린 콘도미니엄이 일반적인 시설이기 때문에 쾌적한 삶이 가능하다. 나는 대부분의 일과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싱가포르의 헤드헌팅 기업을 연락하거나 일자리에 지원 하면서 보냈고, 점심과 저녁을 요리해 먹는 것이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었다. 집 앞에는 중형 규모의 마트가 있었는데 소고기나 닭과 같은 육고기를 냉장고에 넣지 않고 실온에 진열 시켜 놓은 모습이 이국적이었다. 그래서 장보러 갈 때마다 비릿한 고기 냄새가 진동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또다른 특이점은 요리할 때 가스중앙공급시스템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가스통을 배달해서 쓰는데 길다란 라이터로 항상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이었다. 항상 가스레인지로 불을 켤 때는 혹시 폭파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렇게 집에서 업무를 보고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와서는 요리해 먹으며 지낼 때 가장 행복함을 느끼는 것 같다. 소박해서 수수하기 까지만 누구에게도 종속 받지 않는 자신만의 삶.
<에어비앤비에서 만난 전 스페인 올림픽 선수>
에릭은 어느 날 곧 자신의 친구가 스페인에서 올 것이라고 했다. 에릭의 스페인 친구는 마누엘이라는 사람으로 겉모습으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서양인의 특성상 나이는 쉽게 짐작하기가 힘들었지만 아마 40대 초반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마누엘은 이전에도 에릭의 집에 에어비앤비로 머문 적이 있던 사람이라 그 기간에 친구가 된 듯했다. 서양인은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아이디어 나누기를 좋아하는 특징이라고 있어서인지 2주 정도 지내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었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도 힘든 게 그 당시의 영어실력은 한참 모자랐기 때문에 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서 마뉴엘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예전에는 올림픽 선수로 활동했다는 것, 많은 서양인들이 그렇지만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 상당히 많은 나라들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는 것, 지금은 아시아에 있는 인재들을 유럽에 소개하는 헤드헌팅 비슷한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은 에어비앤비가 상업적으로 변색되었다고는 하지만, '에어비앤비 스피릿'이 충만한 글로벌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한 날은 싱가포르에 갈 일이 있다면서 아침부터 급하게 나가더니 오후 서너 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냐고 물으니까 자기의 전 여자친구인 중국인을 만나러 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자 '자신은 지금 홍콩에 출장 중이다' 라며 매섭게 말하고 끊었다며 슬퍼했다. 아직 전 여자친구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는지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물론 연애 이야기를 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말레이계와 중국계에 대한 특성에 대한 인사이트를 들려주기도 했다.
직업적으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 인종을 비교하면서 배인 직업적인 특징 같기도 했다. 들려줬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건 말레이 사람들은 콘도와 같은 고층 빌딩을 좋아하지 않고 개인 단층 주택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말레이 사람들은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경기가 열릴 때면 집 옆에 있는 경기장인 라킨 스타디움(Larkin Stadium)이 떠들썩 하다며 시간 있을 때 가보기를 권유한 것이다.
지금도 마뉴엘에게 감사하고 있는 건 내가 싱가포르에서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이력서를 달라고 말하며 자신의 싱가포르에서의 인맥을 이용해서 직업을 찾도록 알아봐 줬던 일이다. 알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기도 쉽지 않은데 덕분에 일을 찾았든 찾지 않았던 것은 중요하지 않고, 마냥 친절에 감사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미리 마음을 대비할 수 있도록 긴 조언을 해줬다. 나중에 싱가포르에서의 취업에 성공하고 마뉴엘에게 감사의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으로 받은 이메일을 직접 인용함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조언을 받았는지를 공유하고 싶다.
"싱가포리언은 심플한 삶을 가지고 있어. 일을 하러 가고, 점심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시청하지. 중국에 사는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너는 달라. 앞으로 싱가포르에 살게 된다면 그림 그리기, 음악, 책 읽기, 연극 등 뭘 하고 싶은지 찾길 바래. 싱가포르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을 테지만 누구와 함께 할 것인지 '그룹(비슷한 종족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정확할까?)'을 찾아야해. 오피스에서 비슷한 취미생활을 할 동료들을 찾는 건 힘들 거라고 생각해. 만약 네 동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보낼거야. 동료들이 독신이라면 종교나 인종에 상관없이 퇴근 후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 할거야.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친구들을 만들 수 없다면, 기억해. 문제는 너가 아니야. 싱가포리언은 단지 그런 사람들인거야."
마뉴엘이 준 조언은 앞서서 현대판 노마드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가 후배 노마드에게 주는 따스한 조언처럼도 느껴졌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고 싱가포르 생활이 끝난 후 마뉴엘이 해줬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왜 그때 그런 말들을 해줬는지 이해가 된다고 할까. 렌트비로 한달에 얼마나 지불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얼마만큼의 수입을 벌어들이는지가 3년간 싱가포르에 살면서 싱가포리언에게 받았던 주된 질문이었다. 어떤 취미를 가지고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사람 그 자체로 보기보다는 물질로 평가되는 경험을 싱가포르에서 종종 하곤 했었다. 그래서 앞서 싱가포르에 살았던 어느 외국인들이 지적하듯이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나라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나라라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곧잘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헛헛하다는 느낌을 받곤 했나 보다.
<말레이시아 중국계 커플과의 만남>
가져온 여비는 떨어져가는데 속절없이 한달이 지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평소에 사람이 절박해지면 뭐든지 하게 된다, 기적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어느 날 불현듯 말레이시아 현지에 있는 개인적으로 믿는 신앙 시설에 방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까 아니나다를까 조호바루에도 신앙 시설이 있었고, 다음날 우버를 불러서 찾아갔다. 우버 기사는 처음에는 어딘지 몰라 하다가 곧 안내해줬다.
평일이라서 사람이 없는 한산한 모습이었지만 시설을 지키고 있었던 상주 직원인 40대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그레이스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인이 찾는 일은 없다 보니까 처음에 낯선 타지 사람이 일본사람인줄 알았는지 "일본인이니?"하고 질문을 해왔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레이스는 일본에서 대학교를 마치고 동남아라면 일본어를 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직업을 찾을 수 있다는 인터넷 정보에 의지해서 싱가포르에 직업을 찾으러 왔다는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줬다. 조호바루에서 온지는 한달이 다 지나가고 다음 한달을 살 곳을 찾으러 한다는 나의 이야기도 들어줬다.
사실 에릭의 집은 다 좋았지만 조호바루 시내와는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조호바루 시내까지 나와서 다시 싱가포르 국경을 넘기까지는 시간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교통비 면에서도 비효율적인 장소였기 때문에 싱가포르로 숙소를 옮겨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레이스는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조호바루에 30년은 넘게 살고있는 일본인 여성이 있는데 그 여성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낯선 번호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그레이스를 통해서 내 연락처를 알게 됐다고 했다. 바로 조호바루에서 30년 이상을 살고 있는 일본인 푸(Foo) 여사였다. 한달 머물 숙소를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집은 오래된 집이라 힘들 것 같고(그리고 오랜시간 혼자 사는게 익숙한 사람이라 누군가와 사는게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다), 대신에 자기의 딸과 사위 집에서 살면 좋을 것 같다며 추천해줬다. 그리고 에릭의 집에서 한달 살기가 끝나는 날, 푸 여사의 딸 미셸과 라이언 부부가 자신들의 파란색 작은 소형차로 데리러 왔다. 나의 조호바루 생활을 극적으로 바꾸어준 부부와의 첫만남이었다.
미셸과 라이언은 결혼한지 일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신혼부부 스럽지 않게 권태감이 느껴지는 커플이었다. 이유는 두 사람 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조호바루 신혼 집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서 그런 듯 했다.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식사를 하고. 만약 부부 중에 한 사람이라도 직장에 다닌다면 하루 중에 얼마간은 떨어져서 지내면서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새로운 화젯거리로 삼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탓에, 어쩌면 오래 사귄 커플의 특징 일지도 모르지만 침묵이 편해 보였다. 침묵이 굳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서 각자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이로 보였다.
미셸과 라이언의 집은 체크포인트라고도 불리는 국경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걸어서 20분 정도면 언제든 국경을 넘어서 싱가포르에 가는게 가능했기 때문에, 뚜벅이기도 하고 불필요한 택시비를 아끼고 싶은 나에게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둘의 집은 새로 지어진 콘도였는데 신혼부부가 살기 좋음 직한 방2개가 딸린 작은 아파트였다. 타인의 집에 방문할 적이면 그 집의 전체적인 인테리어를 통해서 주인의 취향을 엿보고는 한데, 한때 유명한 투자은행에서 일했다는 라이언이 손수 디자인했다는 집은 모던한 감성이 느껴졌다. 회색 빛 벽지와 카페를 연상시키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는 기울어진 유리, 나무 원목으로 리빙룸과 키친을 구분하도록 한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중국계 친구들의 특징 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혼자 두는 일이 없고 항상 그룹을 지어서 사이 좋게 함께 하기를 원했다. 미셸과 라이언 부부도 그러해서 고맙게도 매번 식사를 함께 하러 나가자고 제안해 줬다. 말레이시아도 외식 문화가 자리잡아 있어서인지 가끔 집에서 요리해서 먹을 뿐인 지라 부부가 좋아하는 식당을 함께 하나하나 도장격파 하는 느낌으로 찾아 갔어서 매일 저녁 부부와 함께 하는 저녁이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은 중국식 가정식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베트남 요리나 태국 요리를 먹기도 했다. 알고 보니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말레이시아가 월 100만원 수준으로 급여 수준이 높기 때문에 베트남을 비롯해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돈 벌러 와있는 인기있는 나라가 말레이시아였다. 한국처럼 멀리 일하러 나오는 것도 돈을 더 벌 수 있어서 좋겠지만 말레이시아에 나와서 일하는 편이 버는 돈은 적더라도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안심이 되는 걸로 여겨졌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곧잘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는 했다. 사람도 동물과도 하등 다를 것이 없어서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같이 얼굴을 맞대고 식사하는 것조차 싫어 지기 때문에, 함께 식사를 한다는 행위는 참 신기하다. 그리고 이어서 엄마가 조언하기를, 여럿이서 식사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귈 수 없으니 정말 사람을 사귀고 싶다면 1:1 혹일 1:2와 같은 소규모로 식사를 하는게 좋다고 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행위가 '너와 나는 적이 아니라 동지다'라는 동물적인 의식을 강화하는 것일까? 그렇게 두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가족처럼 그들이 가는 모든 곳에 동행하면서 더 두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대해서 이해 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68퍼센트의 국민이 말레이계, 23퍼센트가 중국계, 7퍼센트가 인도계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하지만 중국계가 비율이 적은데도 실질적인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레이계 사람들의 불만이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 불만이 1969년에는 폭발해서 600여명의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대부분의 희생자가 중국계 라고 한다. 그 후에 말레이시아에서는 부미푸트라(Bumiputra, 말레이어로 '토착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책라고 불리는 공공연한 말레이계 우대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이를테면 대학교 입시정원에서 말레이계에게는 90퍼센트를 배정하면서 타인종에게는 10퍼센트만의 쿼터를 할당하고 공공주택 배분에서도 말레이계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준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말레이계를 보호하겠다는 취지이겠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차별 정책을 펼치는 말레이시아 정부에게 로컬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들의 불만이 매우 쌓여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무슬림인 말레이계와 결혼을 하면 배우자를 따라서 같이 무슬림이 되어야 하고 한번 무슬림은 죽을 때까지 무슬림이기 때문에 포교 활동이 어렵다는 불만과, 그리고 중국계가 없었다면 말레이시아가 이만큼 성장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중국계 말레이시아 친구들에게 종종 듣곤 했다. 그러고 보면 그레이스가 자신의 큰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는 것을 함께 식사하는 가운데 내게 상담하기도 했는데, 지금 되돌아서 생각해보면 부미푸트라 제도 때문에 말레이시아 외의 나라에서 교육시키는 걸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지금 큰 아들은 호주에서 대학 공부를 하고 있다).
라이언의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말레이계의 중국계 학살 사건 당시에 조호바루의 술탄(이슬람 세계에서 지역의 군주를 일컫는 말)이 다른 주의 술탄과는 다르게 중국계를 괴롭히거나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조호바루의 술탄을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동남아시아에서 화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의 대중매체나 학교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이야기인지라 흥미로웠다.
30대 중 후반인 미셸은 중국과 일본 혼혈의 말레이시아인 이었고 라이언은 중국계 싱가포리언 이었다. 여자 쪽이 몇 살 위였던 연상연하 커플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제일 평균임금이 높은 싱가포르의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라이언도 싱가포르 이외의 모든 동남아국가들이 위험하고 후진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길거리에 차를 주차해 두는 것만으로도 강도를 당하는 말레이시아가 얼마나 위험한지, 인터넷 신청을 한지 몇 주가 지나도 인터넷 기사가 설치하러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말레이시아가 얼마나 행정시스템이 느린지 불평했다.
한편 미쉘의 어머니이자 일본인인 푸 여사도 흥미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인 남편과는 대학교에 다닐 때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데 남편과는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어린시절에 사별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자동차 운전도 못했다고 하는데, 자동차 운전을 못하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말레이시아이기 때문에 뒤늦게 운전을 배웠다. 나도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한국에서 운전면허 학원을 다니면서 생각보다도 자동차 운전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 역시 처음에는 자동차 운전이 무섭고 겁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또 로컬들을 상대로 일본어를 가르치며 혼자만의 힘으로 두 아이를 길러냈다고 한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누군가의 말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지 않을까.
지금은 60대 이지만 그녀의 젊은 시절인 90년대 초반에는 한창 일본 기업들이 말레이시아에 진출하던 때이다. 일본기업은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 동남아시아 국가에 생산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말레이시아가 첫 진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호바루에는 지금도 다수의 일본기업의 공장들이 있고 일본인 주재원 아이들을 위한 일본인 학교도 있다. 현재는 인건비가 싼 태국 등 다른 동남아 국가들로 공장 이전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활기를 잃은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시절 푸 여사가 이 도시에서 일본기업의 통역으로 때로는 일본어 선생님으로 활약했을 모습이 아련히 그려졌다.
현재는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를 중심으로 많은 다국적 서양기업들이 말레이시아에 진출해있다. 기본적으로 영어를 비롯, 말레이어, 중국어를 기본적으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이고, 마찬가지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인 필리핀이나 인도 보다는 치안이 안전하면서, 옆 나라 싱가포르 와는 1/3 정도의 임금으로 노동자를 부릴 수 있는 나라가 말레이시아인지라 다국적 기업에게는 매력적인 시장일 것이다.
라이언은 직선적인 사람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따스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를 진정으로 알기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는 말을 날렸기도 했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씨 나락 까는 사람보다는 앞에서 욕하고 뒤에서는 욕하지 않는 자신과 같은 스타일이 낫지 않냐는 논리였다. 나는 앞에서 욕하는 사람은 뒤에서도 또 욕하더라, 결국엔 뒤에서 욕하는 인간이랑 같다는 대답을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렇게 뼈아프게 이야기 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라이언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진정한 내 사람이라고 여기고 가까이 두는 경우가 많다.
말레이시아에서 해외취업을 한다고 도전하던 시기에는 종종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었는지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고 느꼈는데, 마누엘의 이어 라이언도 툴툴 거리면서도 나의 해외취업을 도와줬다. 과거 짧게 인사부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서 라이언은 내가 쓴 이력서를 첨삭해줬다. 싱가포르 취업에 관해서는 인터넷에서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 해외취업자의 조언에 따라서 미국식 이력서를 작성했는데, 미국식 이력서가 아니라 지원자의 사진을 부착하는 것이 큰 특징인 싱가포르 식 이력서를 적으라는 등의 조언이었다.
그런 여러 사람들의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 조호바루에 발을 디딘 두 달 만에 두 곳에서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한 곳은 사과 마크로 유명한 미국계 기업의 단기간 계약직 포지션이었고 다른 한 곳은 일본계 기업의 정규직 포지션이었다. 나의 선택은 잠시의 지체없이 정규직 포지션이었다. 비록 정규직 포지션이 계약직 포지션보다 100만원 가량 급여가 낮았지만 말이다.
라이언은 그 결정이 잘못됐다고 말했다. 자신이라면 미국계 기업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면서 더 나은 기업의 포지션에 지원하는 밑천으로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해준 또다른 조언은 일본계 기업에서 너가 아무리 성과를 만들어낸다고 한들 일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본사로 채용되는 특별 케이스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그 말들을 가슴깊이 듣지는 않았는데, 훗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라이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과거 조선시대처럼 아무리 서자가 특출하다고 해도 과거 등용이 안되는 것처럼 아무리 실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일본 본사에 고용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반면 미국계 기업이라면 본사나 현지 채용의 차별이 없어서 필요에 따라서 일하는 나라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오스카 와일드의 "경험이란 것은 그저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붙여 준 이름일 뿐이다"는 격언을 떠올릴 뿐이다.
이런 말레이시아에서의 경험이 있어서일까. 처음에는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이 왔던 말레이시아였건만 지금 말레이시아를 생각하면 따뜻한 추억으로 부드럽게 미소 짓게 된다.
언젠가는 버스를 탈 때 잔돈이 없어서 난처해 하자 선뜻 자신의 돈을 꺼내 준 현지 무슬림 여성. 같은 버스 자리에 함께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게 여자인 친구들 보다는 남자인 친구들이 많을 것 같다며 코멘트 해준 것과 결혼한지 수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서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에 알고 있는 내 나름대로 가지고 있던 이슬람 지식을 동원해서 "언젠가는 알라(신)이 선물을 주실 거야"라고 그녀를 위로한 일이 생각난다. 또 한번은 조호바루 살면서 여권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말레이시아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관공서에 가서 '여권 잃어버렸습니다'라는 신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때 마음씨 좋은 중년의 책임자 아재가 귀빈들만 올 것 같은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며진 도서관으로 안내하며 기다리게 한 것과 생수 한 병을 건네면서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싱긋 웃어 주신 배려. 쿠알라룸푸르 한국대사관에 여권 발급신청을 하러 갔을 때 대사관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직원이 "이곳(한국 대사관)은 당신의 집입니다"라고 따뜻한 미소로 환대해준 것들.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따뜻한 추억들.
최근에는 조호바루에 수많은 프리미엄 콘도 건설이 이어지면서 조호바루가 제2의 선전(Shenzhen)이 될 것이라는 멘트로 투자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선전은 홍콩 옆에 있는 중국의 도시인데,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2억짜리가 수년 사이에 20억짜리 치솟아서 원래는 작은 어촌마을 주민이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편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의 인력이 싱가포르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속철도 건설을 몇 년째 끌어오면서 조호바루가 제2의 선전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다. 잠시 말레이시아를 스쳐 지나간 이방인은 그저 낯선 이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주던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