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사람 마웅저입니다. 저의 원래 이름은 마웅저가 아니에요. 어릴적에 옆집 누나가 절 돌봐주었거든요. 그때 그 누나가 좋아하던 사람이 마웅저였어요. 자주 절 껴안고 '마웅저' '마웅저'라고 불렀고 주변 사람들조차도 절 마웅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마웅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어요."
선생님이 자기 소개를 하실적에는 예의 자신의 이름에 얽힌 에프소드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신다. 금새 경직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지고, 사람들은 버마라는 생소한 나라를 설명하는 그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간다.
'선생님'이라는 단어에는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누군가를 '선생님'이라고 '존경한다'고 말하는 건 좀처럼 쉬운일이 아니다. 마웅저라는 분은, 그런 내가 망설임없이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다. 오늘은 나의 선생님을 소개하고 싶다.
처음 선생님을 만난건 하자센터라는 대안교육을 펼치는 곳, 그 안에서도 프로젝트형 학교였던 글로벌학교에서다(안타깝게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로벌학교는 학기말마다 현장학습이라고, 해외로 나가 사람들과 적극적인 만남을 가져왔다. 3번째 현장학습 장소로 선택된 곳은, 태국의 치앙마이와도 가까운 메솟(Maesot)에 있는 버마인들을 위한 난민캠프였다. 그리고 버마라는 나라에대한 이해를 도와줄 사람으로서 마웅저 선생님이 초대된 것이다.
그는 오랜기간 군부독재로 신음하는 버마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서 어떻게하면 그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색해보자고 마음 먹는다.여러 나라들 가운데서도 그의 마음을 끄는 나라는 한국이었다. 버마처럼 오랜 군부독재로 신음한 나라. 하지만 국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 또한 김대중이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꼈다. 그렇게 오게 된 한국. 경제적인 이유로 공장에서 일한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기 힘듬을 깨닫는다.
한국에는 비단 마웅저 그 뿐만 아니라 조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가진 버마인들이 여럿있었다. 누구는 <NLD(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아웅산 수지 여사가 지도자로 있는 버마의 정당)> 한국지부를 설립했고, 그 역시 당원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퇴한다. 많은 정치 단체가 그러하듯이 행동이 결여되어있고, 대신에 말만 넘쳐났다고 느꼈던 것일까?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다. 대신 그는 버마 어린이들의 교육을 후원하는 단체, <APEBC(Assistant Program for Education of Burmese Children)>를 설립했다.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결국 교육만이 희망이라고 느꼈던 것이리라. 예전의 APEBC이 지금은 <따비에(Thabyae, http://thabyae.tistory.com/)> 라는 단체로 성장해, 버마 어린이들의 감수성을 풍요롭게 하게끔 한국 동화책을 버마어로 편찬하는 사업, 버마 국내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양마 마웅저 아저씨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들이 미얀마 사회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동화책을 내셨다. 따비에의 후원 행사를 겸한 행사로 2017년 서울 하자센터에서 열렸다.
단지 이런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해서 선생님을 존경하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 순수한 동기. 그리고 엄격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예전에 선생님이 프레시안에 매주꼴로 기사를 적으셨을 때, 선생님의 한국어를 다듬는 일을 몇번 거든적있다. 어느 겨울, 기사 적기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 여느때처럼 버마 아이들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데 선생님이 자꾸만 얼굴을 훔치시는 거다. 더운 나라에서 오신 분이니만큼 날이 추워서 콧물이 흐르는 걸 닦는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이었다. 그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을 수 없을 날이다.
그때까지만해도 '활동가가 되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던 나는, 선생님처럼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자문했다. 나는 그러한 "진정성"을 가지고 있나, 하고. 월급이 50만원밖에 안된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일했수 있나, 하고. 40대가 되어서도 선생님과 같은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선생님이 무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작년 겨울에 오랜만에 만나 뵈었을 때는, '오늘 버마 관련한 행사에 참여했는데 거기 사람들이 주장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도중에 나와버렸어요'라고.
일부 버마인들이, 원래는 경제적인 이유로 온 사람들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살고 일할 수 있는 지위를 얻기 위해서 갑작스레 정치활동을 시작하고 난민신청을 하는 행위를 비판하시면서 함께 APEBC 활동을 하던 동생들에게 난민신청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셨단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정문태와 버틸 린트너(Bertil Lintner)를 강하게 비판하셨던 일도. 요즘은 페이스북에 "선생님 좋아해요" 라고 적는 어린 팬들도 곧잘 눈에 띄는 등 일본어 표현을 빌리자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계신, 연예인 같다.
10년만에 한국정부로부터 난민지위를 얻고, 처음 태국 난민캠프를 다녀오셨을때 그때는 호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으셨을 텐데 같이 일하는 NGO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지 않았던 기념품을, 나에게 사주셨던 일을 잊지 못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못난 사람이지만, 언젠가 기필코 버마를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진심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좌우명.
한 개인의 활약이 얼마만큼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지 보여주는 이 분. 이 분을 닮고 싶다.
2013.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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