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퍼드 기어츠/김용진 역, 『극장국가 느가라』를 읽고서
오늘날 인도네시아 발리는 전세계 웰니스(wellness) 산업의 최첨단을 확인할 수 있는 섬이지만, 사실 인류학적으로 고전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도식 국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발리의 연구 가치는 높다. 이유인즉,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도 발리는 19세기말까지 이슬람화와 네덜란드 지배를 비껴간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인도가 미친 영향은 막대해서, 5세기~15세기에 걸쳐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고전시대 인도식 국가가 존재했지만 20세기 초까지 남아있었던 곳은 발리뿐이다. 네덜란드 군대가 1908년에 식민화 시키기 전까지, 발리는 고스란히 인도식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는 좋은 연구의 대상이 된다.
발리가 이렇게 외세의 손길에서 벗겨난 배경에는 지리학적인 요인이 있다. 발리는 남쪽으로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인도양은 항구가 빈약하고 물길이 험해서 교통량이 거의 없었다. 반면 아시아의 지중해라고 할 수 있는 발리 북쪽 자바 해를 따라서는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자바인, 부기스인, 말레이인, 그리고 유럽 상인들이 빈번하게 왕래했다. 발리가 힌두교 문화를 늦게까지 고수한 배경에는 이렇게 지리적인 고립에서 기인한 것이다.
저자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하버드대학교 사회관계학과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후, 인도네시아에서 장기간 현지조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본 저서『극장국가 느가라』는 발리의 사례를 통해서 고전시대 인도식 국가 및 정치체제는 어떠한 구조를 띄고 있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1) 느가라(작은 도시)로 이루어진 정치체제
먼저, 책 제목이기도 한 ‘느가라(Negara)’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인도네시아어가 그러하듯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작은 도시"를 의미한다. 발리는 한 명의 통솔자가 발리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구조가 아니라, ‘느가라(작은 도시)’가 여럿 존재하는 정치구조로 되어있음을 제목을 통해 시사하고자 한 것이다. 발리는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만들 능력이 부족했으며, 19세기 당시 믕위(Mengwi), 따바난, 바둥, 기안야르(Gianyar), 끌룽꿍(Klungkung), 까랑아셈(Karengasem), 방리(Bangli) 총 일곱개의 군주국이 있었으며, 서로의 힘을 견제하는 형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발리의 ‘느가라'가 완벽한 봉건제 국가도 관료제 국가도 가산제(가족재산) 국가라고도 볼 수 없다. 유교권인 중국 혹은 로마제국에서처럼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체계적으로 등급화된 행정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느가라는 일군의 주권자들 위에 불완전하게 부여된 서열 중심의 의례적 질서로 이루어진 ‘연맹체'였다.
2) 의식, 의례가 중심이 된 사회
발리의 ‘느가라(작은 도시)’들이 얼마나 의식, 의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에 대해서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이를 테면 네덜란드군에 의해 함락당할 당시 왕족들은 극적인 네덜란드군이 발포하는 속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것으로 타자가 보기에 극적인 죽음의 장면을 연출하는가 하면은, 일상 생활에서도 서품식, 왕국 영내 정화의식, 사원 봉헌식 등을 때로는 5만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치 사상의 중심적 주제를 ‘상연'해냈다.
이 의례들이란 하나같이 극적인 형태로써, 또다른 예로는 사망한 왕을 따라서 후궁 몇몇들이 산채로 불길에 뛰어든다거나, 영주와 함께 화장되길 원한다는 뜻에서 카스트제도 최하위층 수드라들의 시신들을 꺼내서는 함께 화장시키는 식이었다. 물론 각 나라의 문화와 관습은 존중되어야 마땅할 것이고, 타자의 시선에서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일찍이 발리를 점령했던 서양인은 이런 ‘미개한' 의식을 근절하기 위해서라도 서구의 정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전염병처럼 고약한 풍속인 수띠(sutee)는 영국의 지배 덕분에 인도에서 근절되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네덜란드도 발리에서 수띠를 근절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왔다. 수띠 같은 일이 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이 미개한 인종을 정복하고 인간화하며 고대 문명을 대체할 권리를 행사해야 하는 정당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Helms, 1882).”
결론적으로 서구인에게 근절의 대상이었던 발리의 의례들은 자족적(自足的)인 성격들로 최상층 카스트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들과의 간격을 줄이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의 차별화를 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졌다.
3) 현지화된 카스트제도 - 왕의 신성성과 주류 세력이 된 수드라 가문
동남아시아에서 생겨난 인도식 앙권의 특징은 “신성성"이라고 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보통 왕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묘사되고는 하는데, 동남아시아의 인도식 왕권에서는, 왕은 신성성의 화신(힌두교, 불교 혹은 그 둘의 혼합)이었다. 인도에서 카스트제도가 위계와 지배를 아우르는 복잡한 분화 및 재통합이었다면 발리에서는 그런 분화 및 재통합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 전반에서도 역시 일어나지 않았음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수드라는 카스트제도 최하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인도에서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비교했을 때 발리에서 보여진 수드라 가문이 보여준 행보는 독특하다. 당인 삐껀은 따바난 중심부에 위치한 매우 거대한 수드라 가문이었는데,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영내의 주도적 가문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 힘과 영향력은 다른 한 가문을 제외한 모든 가문들과 겨룰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4) 영주와 신민들 사이의 느슨한 지배관계
마지막으로 볼 것은 발리 영주와 신민들 사이의 느슨한 지배관계이다. 발리 인구의 90%는 까울라라고 불리던 사람, 굳이 표현하자면 신민들이 차지했다. 주로 농업이나 수공업 혹은 둘 모두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영주에게 해야하는 의무는 의례적 봉사와 군사적 지원이었을 뿐으로, 이 의무 한계를 넘어서까지 속박되지는 않았다. 까울라는 소작농, 농노, 하인, 노예, 그 무엇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신민도 아니었다. 저자는 까울라는 “끝없는 정치적 오페라 무대 담당이자 조연이자 박수부대였다”고 설명한다.
글을 맺으며
네덜란드의 학자 빅토르 엠마누엘 코른(Victor Emanuel Korn)은 1932년 <발리의 주소법(Het Adatrecht Van Bali)>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발리에는 “영역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정부가 부재"하며 따라서 발리 왕국은 “거대한 실패"라고 진단한바 있다. 생각해 보건데 코른이 지적했던 것과 같이 발리 전체를 아우르는 중앙집권적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을 거대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발리의 고대사회를 지탱하는데 있어서 이 같은 정치구조가 가장 적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서구에 서구열강에 지배를 당한 후 갑자기 생겨난 근대국가라는 체제하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인 혼란에 빠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각 사회마다 적합한 국가의 형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202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