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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Nov 25. 2019

주머니 속 흔적들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이 오려는 그 애매한 가을과 겨울 사이의 미적지근한 11월의 온도가 매우 반갑지 않다. 아침에 출근하려 눈을 떴을 때 이불이 내 목 아래에서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져 있다면 이제 추위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다. 


절대 춥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아끼는 베이지색 코트를 꺼낸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기고 한 번쯤 입었으니 뭐, 괜찮겠지. 그리고 혹여 호주머니에 뭐가 있나 뒤적뒤적해본다. 난데없이 종이가 집힌다. 주섬주섬 꺼내본다. 현금 5천원이다. 필요할 때는 그렇게 없던 이 현금이 따뜻한 계절 동안 옷장에 숨어 지내던 코트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급하게 넣었던 것 같다. 현금이 꼬깃꼬깃하다. 무언가를 급하게 사려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떤 건지 쉽사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 보려 해도 좀처럼 알 수가 없다.


현금이 코트 호주머니에서 등장한 건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오랜만에 입으려 꺼낸 외투에는 현금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등장한다. 잃어버린 줄 알고 재발급했던 카드, 잉크가 지워진 영수증들, 계산대에서 주워온 게 분명한 체리맛 막대사탕, 겨울 내내 신나게 바르고 다녔던 립스틱 등등. 여름옷들과는 달리 겨울 외투에는 호주머니가 있으니 손에 무언가 쥐어진다 싶으면 그저 냅다 호주머니로 쑥 무심히 넣어버리는 것이다. 정리를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쑥쑥 넣어버리고 가방에 툭툭 넣어버리기를 잘한다. 친구가 한 번은 우연찮게 내 가방을 보곤 '이야.. 너 가방은 뭔가 엄청나게 혼란스러운데, 그 혼돈 속에 뭔가 질서가 있어.'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 내 가방과 호주머니는 사실 매우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 담아야 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는, 혼란스럽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주머니'다; 자주 꺼내서 써야 하는 것(예를 들어 립스틱이다. 무언가 집어먹기 시작하면 립스틱은 어느새 사라져 있으니 생기 있는 얼굴을 유지하려면 립스틱이라도 발라야 하므로!) 또는 급할 때 바로 꺼내서 써야 하는 것들은 주머니에 잠시 머무르게 해두기. 나머지는 꼭 가방에 넣어두기. 그렇게 호주머니에 차곡차곡 담아둔 물건들은 봄이 어슴푸레 찾아옴과 동시에 나의 베이지색 코트와 함께 잊혀버리고 만다.


우선 출근이 급하니 코트에 넣어둔 이 물건들을 화장대 위에 널 부러트리고 간다. 네이비색 니트에는 이 베이지색 코트만 한 게 없으니.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의식을 치르듯 샤워를 한다. 오늘도 나름 잘 산 듯하다. 샤워를 마치고 화장대에 앉아 토너를 바르려다가 잊고 있었던 나의 겨울 흔적들을 다시 마주한다. 가만히 기억을 곱씹어본다. 과거를 회상하려는 몸부림이 꽤나 흥미롭다. 내 속에 보관해왔던 돌돌 말려있던 과거의 필름을 하나씩 펴보기도 하고 가끔 꺼내어보았던 과거의 파일들을 널브러뜨려도 보고. 어디에 두고 온 걸까, 이렇게나 흔적이 남아있는데.


존재조차 잊었던 과거의 기억들은 이렇게 불쑥 등장한다. 그때의 나는 무언가 급해서 5천원을 주머니에 종이처럼 꼬깃꼬깃 구겨 넣었겠지. 그때의 나는 카페에 함께 갔었던 그 누군가와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하다 내가 계산한 뿌듯함에 받은 영수증을 주머니에 쓱 넣어버렸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5천원은 나의 지갑에, 영수증은 쓰레기통에 넣어 버린다. 과거의 나는 다양한 감정들이 스쳤던 이 물건들을 주머니에 넣어버렸겠지. 


그리고 그 겨울이 지나고 다시 찾아온 겨울에 만난 그 감정도, 그 기억도 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기도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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