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별오름에 오르면

11월, 가을, 제주

by JIHYE

두 번째 날 아침, 고요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따뜻하게 잔 덕에 아침 8시에 눈이 떠졌다.


침대 옆 창문을 열고 시리지만 시원한 가을바람을 쐬며 잠시 가만히 앉아 의식을 천천히 깨였다. 눈곱 낀 눈을 비벼도 보고 기지개도 켜어보고 가을 햇빛을 가득 담은 풀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벗 삼아 멍도 때려보고. 아침을 맞이하며 서서히 정신의 매무새를 갖추는 것마저도 참 소중한 기억이 되겠다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오늘이 또 얼마나 좋아질까 생각하면서 고요한 게스트하우스에 누가 될까 까치발로 샤워실로 향했다.


가을의 제주도를 결심하게 된 이유라면 2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가을 제주바다를 보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갈대가 가득한 새별오름을 오르는 일이었다. 산과 같이 무언가를 '오르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제주도의 오름을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조금 모순된 취향일지도 모르겠다. 오름을 좋아하게 된 건 내가 오른 자취를 내 눈으로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과 그 오른 동산의 형태를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있다는 것. 그 오름을 눈에 담은 채 큰 숨을 몇 번 쉬면 마음속 담겨있는 짐들을 정상에 내려놓고 조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름이 밀어주는 등 떠밀림에 기분 좋게 내려올 수 있다는 것. 그런 느낌들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제주도를 생각하면 오름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내리니 멀찌감치 동그란 베이지색 동산이 하나 보였다. 지도를 켜 확인해보니 그 동산이 새별오름이란다. 멀리에 보이는 새별오름은 상상했던 것과는 달라 조바심이 났다. 갈대가 가득한 새별오름을 상상했는데, 민둥산처럼 보이는 동산에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스멀스멀 올라가는 그림은 내가 그려왔던 오름과는 달랐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상황을 마주할 때 그 '다름'을 집중한 나머지 다른 아름다운 광경들을 미처 눈 돌려 보지 못하는 무지한 인간은 또 같은 모양을 반복해버리나 보다. 오름에 가까워질수록 안도의 한숨과 같은 감탄의 큰 숨 같은 것을 쉬었다. 베이지색 민둥산처럼 보였던 그 베이지색 무언가가 모-두 갈대였다. 한 발씩 가까워지자 갈대는 나를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환대를 해주는 것인지 더 힘차게 흔들렸고 그 흔들리는 갈대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헛웃음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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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을 올라가는 길은 꽤 길고 가팔랐다. 아이들은 다람쥐처럼 지치지 않고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니 신기하더라. 오르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또 오르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올랐다. 이리저리 나부끼며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 스륵스륵 소리를 내는 아름다운 갈대의 움직임을, 이 모습을 오래도록 잊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었을까. 문득 머릿속에 그런게 있었음 했다. 눈으로 순간을 담은 것들을 녹화해 두었다가 꺼내고 싶을 때 꺼내서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사진으로 영상으로 아무리 담아도 이 순간과 마음들을 오롯이 기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상에 올랐다. 눈 앞에는 오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갈대와 옹기종기 모여있는 제주의 마을들, 그리고 하늘 위 따뜻하게 떠 있는 해가 놓여 있었다. 멀리에서 온 듯한 시원한 바람이 오름을 오르느라 댑혀진 몸 사이로 들어와 땀을 식혀주었고 가빠진 숨 사이로 틈을 만들어 주었다. 마음속 정처 없는 짐들은 이 곳에 두고 가자. 터를 잡지 못해 유유히 떠돌던 짐들은 이 곳에 두어도 좋겠다 생각했다. 정상 한 켠에 누군가들이 앉아 만들어 둔 갈대 방석이 있어 나도 앉았다. 주머니에서 터질까 나름 조심해서 들고 온 제주 귤을 까먹으며 오름 위에 앉아있으니 당장의 마음이 좋아져 버렸고 그 아무 생각 없이 좋아진 마음이 또 좋았다.


이렇게 그냥 오름 위에 앉아있는, 그 어떤 순간이 좋은 적도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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