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가을, 제주
제주에 머물며 매번 하루를 끝내는 곳은 동네 근처에 위치한 심야식당이었다.
잠시 숙소에 들러 어깨를 짓눌렀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은 가벼운 복장으로 설레설레. 휘적대며 걷는 그 발걸음은 마치 제주 동네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매우 설레어하고 있다는 발걸음이었다는 건 그 누구라도 알았을까.
마지막 밤 들렀던 식당은 종달리에 있었는데 잘 살펴보지 않으면 자칫 놓치기 쉬운, 가정집처럼 생긴 아늑한 곳이었다. (사실 한 번은 그냥 지나쳤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여니 여섯일곱 개 정도로 보이는 의자가 바 테이블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둘러있었다.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볼 법한 모양새였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방문을 한 탓인지 첫 번째 손님으로 입장했다.
무미건조하고도 나름의 따뜻한 미소가 머금어진 짧은 "안녕하세요-" 인사가 오간 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래 머물고 싶어진 탓에 찬 바람이 머묾을 방해할까 창가에서는 조금 멀어진 중간 즈음을 택했다. 주인분께서 건네주시는 메뉴판의 가장 윗자리에는 '혼술 세트'가 적혀있었다. 달고기 튀김과 고로케, 그 외의 몇 가지 찬이 나오는. 하이볼과 함께하면 참 좋을 안주들이었다. 주저 없이 혼술 세트로 주문했고 안주 겸 저녁이 나오는 동안 우롱 하이볼을 홀짝댔다. 한 잔을 반 정도 마셨을 즈음 가져다주신 따뜻한 고로케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잊지 않고 우롱 하이볼을 한 모금씩 곁들이며 여행의 회포를 홀로 풀어보기로 한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 '마지막' 그리고 '밤'이 주는 알 수 없는 느낌들이 있다. 여행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아쉬움과 함께 돌아갈 집을 생각하며 느껴지는 안락함 같은 것. 그 느낌들이 뒤섞인 마음을 두 손 가득 들고 컴컴해지는 밤을 마음속 깊이 삼키면 먹먹해지기도 잔잔해지기도 한다. 그런 마지막 밤이면 괜스레 눈이 게슴츠레 떠지고 만다. 허공 속에 그 어떤 물체도 담지 않은 눈으로 그 어떤 생각도 담지 않고 다가오는 시간들을 무중력의 느낌으로 맞이하면 그 순간들을 더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은.
나에게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아름답게 시작되지 않았던 쪽이 많다. 기억의 텀이 충분히 주어져야 맞이해야만 했던 마지막의 순간들이 조금은 아련해질 수 있다. 그 아련함이 주는 마음이 이내 고마워질 때서야 꾸역꾸역 아름다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그 기억의 텀이 주는 시간은 짧아지기도 하는데, 그 짧아지는 시간들이 다행이기도 하면서 허탈하기도 하다. 마음을 나누었다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마지막, 소중히 여겼던 소원팔찌와의 마지막, 가수가 어렵사리 내뱉는 '마지막 곡입니다'라는 말로 막을 내리는 공연의 마지막. 등등등. '마지막'이라는 단어 하나로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순간을 담은 기억들이 말 그대로 '기억'의 아카이브 챕터 143,342 정도가 돼버리고 마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맞이하기 힘든 맺음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런 단어가 신기하게도 이번 제주 여행에서만큼은 나에게 '마지막' 그 자체로 빛났다. 가을의 제주를 다시 만나게 되어도 오늘과 같은 하루를 온전히 겪지 못할 텐데도, 혹여 똑같은 여행의 발자취대로 똑같이 걷게 될 수 있다 해도 오늘 만났던 길거리 들꽃들은, 오늘 마셨던 미세먼지 제로의 가을 공기들은 같지 않을 텐데도. 추억으로 기억되는 마지막의 순간이 마냥 아쉽지만은 않은 저릿하고 따뜻해진 마음이 오래도록 스몄다.
때마침 나온 달고기 튀김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니 이번 가을 제주여행의 마지막을 더 시원섭섭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 또 맞이할 제주의 마지막을 벌써부터 기약해보는, 시작보다는 마지막을 더 기대할 수 있게 한 마지막 밤이 고마운 마음 한가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