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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r 08. 2020

승진을 했다

월요일이었다.

브랜드의 첫 SNS 화보 촬영이 있어 아침 댓바람부터 촬영할 옷들을 체크하고 현장을 확인하느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정신이 아득했다. 오늘을 하루 종일 제정신으로 살아도 모자랄 판에.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가다듬고 커피 한잔을 크게 마셨다. 별 것 아닌 일에 불쑥 찾아오는 걱정과 부담은 이제 쉽게 내려놓을 때가 됐다. 불쑥 찾아오는 마음의 불안은 말 그대로 ‘불쑥’ 왔으니 ‘불쑥’ 사라져도 되는 어쭙잖은 것이니까.


“선배, 축하해요! 이제 권 과장님이라고 불러야겠다!”


띠링-. 한 때 같은 팀이었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부리나케 회사 그룹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사항을 확인하니 ‘2020년 정기 승진 및 인사발령’의 제목으로 글이 올라와 있었다. 회사의 전략 방향에 대한 이해도, 최근 3년간 누적성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발하였으며… 라는 말과 함께 가나다순에 맞추어 내 이름이 제일 앞에, 과장 승진 명단에 떡하니 적혀있었다. 공채로 이 회사에 들어왔기에 때 맞춰 따박따박 승진시켜주는 것이라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으나 막상 그 공지사항을 보니 또 아득했다.


아, 나 이제 권 대리가 아니라 권 과장이네.



사회로 내던지기 전 ‘취준생’ 신분으로 6개월을 수도승처럼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집밥을 먹고 내 방 창문 앞 책상에 앉아 망부석처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창문 넘어 보이는 나무들은 점차 푸릇푸릇해졌고 어떤 나무는 벚꽃을 만개한 후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지기도 했다. 창문 너머 보이는 나무들이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안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수많은 자기소개서를 썼고 온갖 포부들을 써 내려가며 다양한 회사의 회사원이 된 나를 자주 상상했다.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가는 날에는 미리 사 둔 어색한 검은색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고속버스를 탔다. 가는 내내 면접에서 이야기할 자기소개와 마지막 멘트들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긴장될 일도 아녔을 텐데 버스에서부터 면접장까지 내 두 손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렇게 몇 번의 상행 버스를 탔고 나는 지금의 회사에 ‘공채 7기’로 입사했다.




회사원으로서의 나를 크게 의심한 적은 없었다. 조직의 일원으로 회사를 위해 기여하는 것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고, 되려 주어진 업무보다 더 많은 책임을 쥐여주는 때에도 스스로 부끄럼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나를 쥐어짜며 일을 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랐다. 외근을 가는 길에 시간을 쪼개 쓰자는 생각으로 택시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밤을 꼬박 새기도 했다. ‘받는 만큼 일한다’는 생각은 나에게 사치였다. 회사의 일원으로 주어진 일이 뭐든 잘하고 싶었다.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 일을 간절히 원했던 만큼.


꼬박 한 회사에서 8년의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할부처럼 나누어 회사에서 보낸 세월이 야속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삶의 잣대를 조금 이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를 존(存)하게 하는 것이 회사에서의 ‘나’ 뿐만이 아니라는 안도감은 시간이 지나며 변해 온 삶들이 말해주었다. 그리고 높이 쌓으려고만 했던 나의 치열한 나날들을 돌이켜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나니, 나아가야 할 ‘나의 길’들을 조금은 더 담대히 볼 수 있게 됐다.


지난주 내내 사람들이 나를 ‘과장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어색했다. 그리고 그 호칭은 오랫동안 어색해질 예정이지만 무겁지는 않다. 걱정과 부담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의 짬밥은 있으니 ‘과장님’으로 사는 회사에서의 하루 중 9시간의 시간은 전과 다르지 않게 열심히 살면 되겠지.


그리고 나는 내일도 불치병인 월요병을 가뿐히 보낼 다짐을 하며 출근길에 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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