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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r 15. 2020

나를 어지럽히는 것들로부터

지하철 출구에서 사람들을 토해내는 강남. 자신의 모습을 뽐내는 자본 냄새가 가득한 브랜드 가게들. 높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빌딩들. 할 수 없이 강남으로 일을 보러 가게 되면 부리나케 마무리 짓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1초 단위로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불빛이 눈을 시리게 하는 번화가에 가면 정신이 아득해진달까. 눈길을 사로잡는 다양한 장애물들을 거치고 나면 멍해지고는 만다. 나의 시야를 꽉 채워버리는 그들의 존재가 달갑지 않다. 


2018년 겨울, 친구와의 약속이 늦어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향하는 길이였다. 저녁 7시 반. 겨울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긴 밤 덕에 퇴근시간이 되면 길거리의 모든 존재들은 새까매졌다. 강남으로 가까워질수록 나의 오른쪽 뺨은 불빛에 번득번득 빛났다. 간판들의 네온사인은 나를 봐달라고 애원하는 듯 자신의 존재를 설득시키려 했다. 강남의 빌딩들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간판들을 보자니, 이토록 존재를 주장하는 것들이 사방 천지인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나 스스로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까란 생각과 함께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졌다. 친구를 만나면 호프집으로 곧장 들어가 목이 따끔해지는 라거를 고르고 단 숨에 들이키고 싶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를 들자면 나를 소멸시키는 것들에 저항하다 이내 포기하게 되어서 살아지는 대로 살아져 버리는 순간들이다. 그 두려움은 당시에는 투쟁에 집중하여 보이지 않다가 처참히 포기하게 되어 살아가다 보면 불시에 찾아온다. 번뜩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보면 나의 일상들이 널브러져 있다. 소파 위 늘어져 있는 어제, 엊그제 입은 옷, 싸늘하게 말라버린 나의 소중한 식물들, 어지러이 쌓여있는 배달음식 껍데기들과 맥주 캔들. 한 차례 나의 거취를 정리하는, 몸을 움직이며 노동을 하는 시간 동안 나의 정신들도 매무새를 바로잡고 삶의 주인답게 살아갈 채비를 마친다. 매주마다 글 쓰는 시간을 절실하게 지키는 이유도 비슷한 행위에 속한다. 일요일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간이 책상에 앉아 커서가 깜빡이는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골똘히 한 주간의 일들을 돌이켜보면, 다양한 순간 속 나는 나에게 어떤 답안지를 내밀어 주었는지를 대담히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수록 지난 시간들을 진정으로 보내주게 되며 더 나은 내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갖게 되는. 일종의 건강에 좋은 코카인 같은 각성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가까운 친구들은 나에게 참 바쁘게도 산다고들 말한다. 회사가 끝나면 요가원을 가고, 내가 주최하는 문화모임 주제들을 준비하고, 머나먼 땅에 사는 노란 머리 선생님과 비디오 챗을 하며 영어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게으르지 못한 편이기도 하지만 발장구를 치지 않으면 침몰해버릴지도 모를 나의 시간들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다. 주어진 시간 속 애쓰지 않아 버리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 때에 그 어떠한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아 나는 또 사는 대로 살아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선택의 순간에 나는 또 소멸하고 말 것이다.


집중하며 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공허해져 버린다면 그 또한 나를 위했던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허함이었으면 한다. 복잡해져 버린 세상에서 나를 지지하며 살아가려면, 강남 한복판 서 있는 나에게 쏘아대는 네온사인이 가득한 간판들에 둘러싸여 정신이 아득해져도 목적지로 정확히 걸음을 옮길 수 있으려면, 집중해서 살아가는 순간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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