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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r 22. 2020

사물이 안경을 통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안경을 새로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섰던 건 드라마 ‘봄밤’을 보는데 한지민이 쓴 안경이 너무 예뻐 보여서였어.


안경을 쓴 한지민이 예뻤던 건지 아님 안경이 정말 니-트(neat)했던 건지는 모르겠어. 나의 소비욕구는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안경이 사고 싶었던 건 처음이야. 네이버에 검색창을 열었어. 쑥스럽지만 ‘봄밤 한지민 안경’이라고 검색을 해봤지.


헤엑-. 안경이 무슨 20만 원이 넘는 거야. 나에게 안경은 ‘잘 보이게 하는 것에만 힘을 다해야 하는 용품’이라, 20만 원 넘게 주고 안경을 사고 싶진 않았어. 부리나케 관둬버렸어. 


안경을 사겠다는 의지가 조금씩 사그라들 때 즈음, 서울숲을 혼자 슬렁슬렁 돌아다니던 중에 어떤 안경가게를 발견했어. 사장님이 직접 하시는 브랜드 같더라고. 스윽-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내가 사고 싶었던 안경과 비슷한 디자인을 발견했어. 그게 뭐라고 심장이 콩닥콩닥. 빛바랜 금색, 동그랗지만 야무지게 각져있는 얇은 테, 가볍디 가벼운 무게. 조심스레 안경을 들고 얼굴에 걸쳐보았어. 한지민만큼은 아니지만 안경을 쓴 내 모습이 딱히 어색해 보이지 않아 속으로 깨나 기뻐했어. 


‘잘 고르셨어요. 티타늄이라 가벼워 오래 쓰셔도 편하실 거예요.’


어떤 가게를 가면 사장님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 가게에 대한 신뢰도를 결정하기도 하는데, 멀찌감치에서 안경을 수리하고 있던 사장님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계방에서 낡은 시계들과 고군분투하는 장인의 느낌을 풍겼어. 일어선 채로 내 앞에서 이야기하실 때의 모습은, 풍채는 작으시지만 자신이 만든 안경에 대해 짧은 문장들을 다부지게 엮는 듯 보였어. 자신의 일을 흔들림 없이 해 온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우직한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 그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고.


그리고 난 안경을 구매하기 위해 군말 없이 지갑을 열었어.



안경을 구매한 다음날, 회사 근처 안경원에 들렀어. 시력을 재는 기계에 앉아 멀찌감치에 있는 열기구를 몇 차례 보고 나니 찌직직- 기계에서 내 시력을 평가한 영수증 같은 것이 나왔어.


문득 궁금한 건데… 그 열기구 사진은 어디일까? 시력을 잰지도 이제 10년도 넘는 듯한데 그 사진은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좀, 외로워 보인다는 느낌이 들어서.


2시간 뒤 찾으러 오시라는 안경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칼 같이 시간을 맞추어 방문했어. 회사에서 안경을 쓰고 일을 하려고 렌즈를 담을 통도 잊지 않고 챙겨 왔거든. 어렸을 때는 하루 종일 렌즈를 끼고 있어도 눈이 참 말짱했는데, 요새는 밤에 찾아오는 눈 시림을 잘 못 참겠더라고. 눈도 나이 들고, 나의 불편함을 참는 인내심도 나이 들고. 나이에 숫자가 더해질수록 낡아져 가는 나의 것들에게 점점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아. 낙낙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려고.


완성된 안경을 코에 안착시켜 보았어. 새로운 안경을 쓰고 조금씩 걸어보니, 시력이 조금 나빠져 도수를 올린 탓인지 바닥이 뱅글뱅글 돌더라고. 아무래도 처음 겪는 높은 도수라 처음에는 조금 어지러울 수 있다고 하시면서 ‘차차 적응할 테니 걱정마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새로운 안경을 쓴 날, 회사에서 마시다 만 메밀차를 책상에 시원하게 쏟았어. ‘사물이 안경을 통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고 느꼈달까. 쏟은 메밀차를 빌미로 책상도 한번 닦고 하는 거지 뭐. 앉아있으니 구수한 메밀 냄새가 나더라고. 뭐, 나쁘지 않았어.




이 안경을 산지 이제 5개월 정도 된 것 같아. 이제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애용하게 되었어.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도 잊지 않고 챙겨 넣어서 모니터를 볼 때 눈이 아주 편안해졌어. 안경에 나를 적응했더니 일상이 윤택해졌지. 


안경에 적응하면서 느낀 건데 말이야, 사람은 자신 주변에 존재하게 되는 모든 것들에 끊임없이 적응을 요구받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요구에 응하기로 결심하는 되는 순간 함께 찾아오는 우여곡절들을 겪게 되잖아- 마치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그때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넘어질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그 순간들이 자연스레 지나갈 수 있도록 시간의 강에 몸을 맡기어보면 어느새 그 배경에, 그 관계에, 적응하게 되어버린 나를 발견하기도 해. 


꽤 소란스러울 수도 있는 과정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일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새로운 것들에 적응해보려 하는 나의 아름다울 수많은 우여곡절들을 기꺼이 감내할 탄탄한 마음이 지금보다 더 탄탄해졌으면 해. 적응하고 깊숙이 안아봐야만 하는 나의 것들은 이곳저곳에 모습을 숨긴 채로 나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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