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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Mar 01. 2020

소문의 중심에 서면

영화 ‘Easy A’의 여주인공 올리브(엠마 스톤)는 조지라는 남자와 ‘잤다’는 소문에 휩싸인다. 올리브가 지나가는 길 위, 다수가 뱉어내는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는다. 그녀를 향한 불편한 관심 속 올리브는 결심한다.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기로.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소문을 이용하기도 하고 되려 그 낙인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의 어릴 적 사건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과외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언니, 오빠들은 교과서가 가득한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우리 집으로 또다시 등교했고, 현관 옆 작은 방에서 엄마와 함께 문제집에 얼굴을 묻은 채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서부터였나, 나는 학원에 가는 대신 엄마의 공부방 학생 1이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나의 과외선생님이기도 했고 나의 엄마이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있던 주스를 한 사발 마시고 공부방으로 들어가 같은 학년의 친구들과 함께 1시간 반 동안 열심히 수학 공부를 했다. 그 방에는 항상 운동장 흙냄새와 양말 새로 삐져나오는 발 냄새 같은 것들이 났다. 시험기간이 되면 학년 상관없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 늦은 밤까지 공부를 했는데, 그럴 때면 거실과 부엌 식탁까지 모두 학생들의 공부터였다. 우리 집 신발장은 항상 아이들의 운동화로 가득했고 누군가는 운동화를 잘 못 신고 가는 흔한 음식점 에피소드가 생기기도 했다. 엄마의 훈계가 무섭긴 했지만 도란도란 모여 공부를 하는 우리의 모습은 깨나 따뜻했다.  



중학교 때 우리 엄마의 공부방은 친구들 사이에서 ‘그 공부방은 시험기간에 밤늦게까지 공부도 시켜주고 계속 다니면 성적도 오른다’는 소문이 퍼졌고 날이 갈수록 집에는 학생들과 엄마들의 문의전화가 늘었다. 반에서 1,2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의 역할도 이 소문에 한몫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은혜가 쭈뼛쭈뼛 화장실 앞에서 나를 불러냈다. ‘나도 너네 엄마한테 수학 배울 수 있어? 나도 공부 좀 해보려고.’ 내 친구 은혜가 우리 공부방에 온다니!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기뻤나 보다. 마음이 선덕선덕 했다. 친구와 같이 공부할 생각에 엄청 신났더랬지. 그 날 엄마에게 친구를 같은 반에 넣어달라고 졸랐고 우리는 그렇게 옆 자리에 앉아 함께 공부했다.



“쟤네 엄마 과외선생님이잖아. 뭐 그렇게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 숙제 안 했다고 회초리 들더라? 진짜 밥맛이야.”



그리고 나는 친한 친구 무리로부터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숙제를 몽땅 안 해 온 은혜는 엄마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씨-게 맞았고 닭똥 같은 눈물로 문제집을 흥건히 적시더니 공부방 시간이 끝나자마자 대차게 현관문을 열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그 날이 은혜가 우리 공부방에 온 마지막 날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공부방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내 뒤에 앉아 친구 무리와 함께 우리 엄마 욕을 하기도 했다. 소문을 선동하는 그녀의 주변 친구들은 나의 친구들이기도 했으나 선동하는 그녀의 행동과 말에 손을 들어주었고, 그 언제부터인가 사실과 진실은 사라져 있었다. 소문은 소문을 만들었고 나는 소문의 중심에 서서 괴로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원망과 억울함이 가득한 얼굴로 쏘아보는 눈을 피하지 않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날은 하늘을 더 많이 마주했다. 그 소문들에 나약해지지 않으려 했고 더 당당히 복도를 걸어 다녔다. 시답잖은 소문들로 나를 괴롭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너희가 뭐라 하던 상관없어. 우리 엄마는 나한테만 멋있으면 돼.’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새로운 친구 무리를 만나 남은 중학교의 일상들을 건강히 보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도 다양한 소문들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으나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지지대 같은 것이 생겼다. 외부의 것들에서 스스로를 지탱한다는 것은,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 되려 자신을 쉽게 무너뜨리고 다시 블록을 쌓듯이 켜켜이, 그리고 굳건히 자신을 쌓아 올릴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전히 그 쌓아 올릴 힘을 위해 철저히 힘을 빼려 한다. 선동하는 사람들 아래 얽혀버린 생각들, 무엇에 동조하는지 모른 채 끄덕이는 사람들, 답이 없는 답안지에 누군가의 인생을 채점하는 다수의 아바타들. 나는 그런 어른으로 크고 싶지 않았기에 어렸을 때부터 나를 무너뜨리는 다수에 굳건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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