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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HYE Oct 12. 2020

무릎을 나란히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생기면 매주 그 날의 저녁은 더 생기 넘친다.


집에 가서 그동안 밀렸던 빨래를 하고 잠깐의 웹서핑을 하다 시계를 보고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까서 빨대를 꼽아 침대에 철퍼덕 누워 한 팔에 턱을 비스듬히 괴고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그때.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움직이는 게 있다면 맥주를 마시는 뻐끔대는 입뿐인 움직임 제로의 슬기로운 여가생활은 한 주의 하루 정도는 필히 가지는 편이다. 최근 즐겨보았었던 예능 프로그램은 시골에 내려간 두 성인 배우가 밭에서 난 채소와 함께 건강한 음식을 만들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널브러져서 놀고먹기도 하는, 나름의 ‘쉼’을 만끽하는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짜인 대본이 있기도 하겠지만 나름 자연스러운 그들의 일상을 보다 보면 출연진에게 이입하기도 하면서 그들과 꽤 친근해지기도 하는데, 어느 날은 친구들과 함께 즐겨보는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꽤 신경 쓰이는 말을 들었다.


“걔 성격 진짜 별로래. 완전 신경질적이라던데. 업계에서는 유명하대~”


나름 비슷한 업계에서 일했던 친구라 신빙성은 가는 소문이었다. 소문의 시작점이 궁금해 ‘어디서 들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친구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그 출연진의 스타일리스트와 친구라는, 의심쩍은 소문의 시작점을 답변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중간에 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이유 없는 소문은 아니였을 것이다. 광고 촬영장에서 스타일리스트와 약간의 논쟁이 있었던 걸까? 아님 다른 프로그램에서 피디와 싸움이 났던 걸까? 아님 드라마를 찍는 그 날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촬영 도중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걸까? 아님 정말 성격이 매우 별로인 것일까? 그리고 문득, 스쳐 지났던 짧기도 길기도 했던 지난 인연들이 생각났다. 나를 향해있던 시선들을 떠올렸다. 매일마다 결과물을 독촉했던 업체의 이사님은 나를 ‘호들갑스러운 권 과장’으로, 보이차를 나누며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요가원 원장님에게는 ‘밝은 에너지의 권 선생’으로, 하루에 한 번은 꼭 랜선으로나마 어쭙잖은 농담을 던지며 웃음이 난무하는 15년 지기 친구들에게는 ‘엉뚱하고 제일 바쁜 (유일한 솔로) 친구’로. 시선은 원망스럽기도 따뜻하기도 했다. 셀 수 없이 수 많았던 인연들은 어떤 또 다른 모습으로 장소와 시간을 배경 삼아 그들의 눈동자를 마음에 포개 나를 담아두고 있을까. 혹은, 담아두기는 하고 있을까. 



나는 나란히 앉기를 좋아한다. 마주 보고 앉기보다 같은 풍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거나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내 눈은 입보다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마주 보고 앉아 나의 시선을 읽히기보단 상대방의 옆모습을 보는 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게 나긋히 보내는 것이 더 좋다. 맞대어져 있는 무릎보다는 네 개의 무릎이 사이좋게 놓여있는 경우가 많았다면 분명, 당신은 내 눈동자를 자주 내어주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고개를 돌려야 하는 약간의 수고를 더하면 한쪽 어깨가 무거워지더라도 그 수고를 보상받을 만큼의 서로의 얼굴을 담는 찰나가 주어지니까. 


그렇게 무릎을 나란히 두고 앉을 수 있는 나의 걸쭉한 인연들이 서로를 소중히 담아주었다면 되었다 싶은 마음에, 스쳤던 수만 가지의 시선들을 향한 번뇌를 이내 거두기로 했다. 그 누군가는 우리가 마주쳤던 그 순간을 나로 정의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그 누군가를 보고 싶은 대로 봤을지도 모르고. 서로에게 닿았던 인연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흐르는 시간 그 어디쯤에 나는 당신을, 당신을 나를 가둬두기로 했다면. 다가오는 주말에는 따뜻한 눈과 표정이 오가는 만남들로 추워지는 계절을 잠시 망각해야겠다. 그리고 그들의 옆모습과 날 보는 눈동자에 내 눈도장을 더 많이 찍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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