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배낭여행일기 2) 지갑을 분실하다

여행의 시작은 늘 집에서 나오고부터 시작된다.

by dearmycanada








지갑 잃어버리기 전 밴쿠버 공항에서




이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방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익숙하게 만져지는 물건의 느낌이 없었다. 왜 모든 불안한 예감은 척척 맞아 드는 것 일까. 한국, 캐나다 신용카드가 모두 들어있는 카드지갑을 분실했다. 그것도 내 '구역' 밴쿠버가 아닌 이 춥고 프랑스어로 사방이 가득 찬 몬트리올 공항에서 말이다. 공항에서 14시간이라는 환승 시간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저렴한 숙소를 골라 결제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뭔가 순탄하지 않을 것 같다고 느꼈던 내 예감이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KakaoTalk_20191115_142840756.jpg 배낭




일단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빈 공항 벤치에 앉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잃어버릴까 봐 앞 가방에 넣어둔 300 미국 달러가 떠올라 급히 환전소를 찾아 50 미달러를 캐나다 달러로 환전했다. 날이 밝으면 우버를 이용해 가까운 스코샤 뱅크로 가서 카드를 재발급받는 플랜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구글 맵으로 거리상 가장 가까운 뱅크를 찾아두었고 카드 재발급이 바로 가능한지도 알아보았다. 무언가 만만의 준비를 하고 카드를 다시 발급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니 아까처럼 앞이 캄캄하지만은 않았다. 잊고 살았던 '여행용 오기'마저 생기면서 화장실 거울 속 분노의 양치질을 하는 나를 보며 다짐했다. 꼭 가고 만다 페루.



KakaoTalk_20200702_073013926.jpg 팀 홀튼 티라테




공항 안에 있는 팀 홀튼에 앉아 허기를 채우다 보니 이왕이면 시내를 나간 김에 몬트리올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광역 밴쿠버를 벗어나지를 않았으니, 새삼 캐나다 동부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설레기도 했다. 그제야 놀랍게도 감사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카드 지갑을 잃어버린 곳이 캐나다의 공항 내부여서 인터넷을 쓸 수 있었고, 환전소에서 환전도 가능했고, 잃어버린 카드를 재발급이 가능했으며 무엇보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 하소연하고 조언을 구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는 돈을 선뜻 빌려주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심지어는 지옥같이 느껴지던 16시간이라는 환승시간이 덕분에 몬트리올을 시간 제약 없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여권과 현금을 분실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내가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아처럼 느껴졌다. 벼락 맞아 초능력이 생길 확률보다 적은 확률을 내가 이룬 것 같은 뿌듯함마저 들었다. 무작정 감사기도를 했다.






나보다 한참을 산 '어른'이 나 같은 '어른이'들을 귀여울 수 있겠지만 살다 보면 그렇더라, 내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노력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불행들이 내 인생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처음엔 나의 나약하고 불온전함에 한 없이 무너지다가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차근차근하면 된다는 깨달음. 그러다 보면 도자히 내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던 일 들도 결국엔 내가 겪어낸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날 때면 불평하고 스트레스받아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진다. 이 순간도 다 지나갈 것이라는, 그러면 나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그런 믿음. 바로 오늘처럼.




KakaoTalk_20191115_142832838.jpg 몬트리올 1 day pass


구글을 켜서 내 동선과 가장 가까운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브런치를 먹고 있었으나, 예산이 초과될 것 같아 그냥 진하고 부드러운 로컬 커피를 맛보는 것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여기저기를 검색하다가 인터넷으로 공항과 시내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인들이 써 놓은 여러 블로그에 자세히 방법이나 노선이 나와있어서 동선을 확인하니 다행히 뱅크과 가까운 곳에 역이 위치해 있어서 우버를 이용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왕복권이 $10이라는 매력적인 가격이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이렇게 나는 마치 몇 년 치의 운을 다 써버린 것 같은 행운을 얻은 것 같았다.





SE-2012f4ec-13ea-4a6d-b65e-85c8d4902944.jpg 새로 발급받은 스코샤 Debit(체크) 카드



한숨도 못 자서 그런지 풍경을 보면서 버스 드라이브를 즐기고자 했던 내 계획은 40분 내내 해드 빙빙 졸음으로 무산되어 버렸다. 그래도 다행히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정말 반가운 빨간 간판, 스코샤 뱅크가 보였다. 은행 웨이팅이 없이 바로 직원에게 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타자 몇 번으로 내게 카드를 재발급해주었다. 재발급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을 시작한다. 아, 정말 캐네디언 다 됐다. 몇 분이 지나고 그토록 간절했던 빨간 카드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살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직원의 손이라도 붙잡고 땡큐를 외치고 싶었으나, 아직 그렇게 까지는 캐네디언화가 되지 않았는지 그건 속으로만 하는 것으로 해두고 서둘러 은행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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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겨울의 몬트리올


이제 몬트리올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몬트리올은 캐나다 동부답게 정말 추웠다. 한국의 12월의 추위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11월에 눈이라니! 올해의 첫눈을 이렇게 어이없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무작정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밴쿠버와 자꾸 비교를 하며 풍경을 보고 있었다. 밴쿠버보다 건물이 조금 더 높은 것 같은데, 조금 더 삭막한 느낌이구나 속으로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길을 걷는데 자꾸 이렇게 비교하는 습관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걸까 생각했다. 온전히 그 풍경을, 날씨를, 공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무언가와 같이 놓고 보고 있었을까.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았는데 말이지, 혹여는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른 대상을 놓고 끊임없이 비교하며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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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어느 카페



그러다 손이 얼어붙을 즈음 거리에서 눈에 띄는 아지만 아늑해 보이는 크지 않은 카페에 무작정 들어갔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많은 빌딩 가여서 for here손님은 나뿐이었지만, 직원들은 자기보다 덩치가 큰 배낭을 짊어진 동영 여자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때로는 이런 무관심이 너무나 고맙고 편할 때가 있다. 부드러운 거품이 있는 라테를 시켜 홀짝거리며 앉아 있자니, 문득 떠오른다. 공항 오기 바로 전 아울렛에서 산 비니를 비행기에 놓고 내렸다. 아, 나란 인간. 집을 나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심지어는 페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첫 번째 여행 에피소드를 만들어낸 나 자신에게 감탄하게 된다.



역시, 여정의 시작은 늘 집에 나오고 나서부터 시작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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