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나의 자부심이다.
"내가 그랬어요."
어렸을 때 내가 한 잘못을 언니가 다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나는 맞는 게 무서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를 맡은 언니는 나 대신 맞기까지 했다.
"아빠 따라갈래? 엄마 따라갈래?"
할머니의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은 이거였다.
"언니 따라갈래..."
그 순간 언니는 지겨워 죽겠다는 눈으로 날 쏘아보았다.
자기도 어린데 죽도록 따라붙는 동생이 있다면 얼마나 귀찮았을까?
그때는 몰랐다. 내 선택이 언니에게 그리 큰 짐이었는지 말이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 두 분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뚝뚝하지만 애정이 있는 착한 언니에게 집착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 너 학교에서 나 보면 왜 인사를 안 하냐?"
"야, 너 왜 웃냐? 왜 웃냐고?!!"
"야, 너 내가 깨우지 말라그랬지? 죽을래? 이게 진짜"
중학교, 고등학교를 올라갈 때까지 우리의 대화는 이랬다.
언니는 매 순간 날 다그쳤고 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언니가 무서웠다. 그러다 언니가 가여웠다.
언니에게 이유 없이 혼나는 날에도 난 말대꾸 조차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호통보다 언니의 눈길 한 번이 더 가여웠다. 언니에게 대들고 싶은 마음은 과자 부스러기만큼도 들지 않았다. 언니가 화를 날 때에도 난 분노보다 웃음이 났다. 그래서 더 맞았다.
그래도 언니는 언니의 방식대로 나를 아꼈다.
"야, 김지혜, 일어나, 너 왜 울어? 맞지 말고 때리라고 그랬지? 바보냐? 누가 그랬어?"
언니였다. 귀 밑으로 오는 짧은 똑 단발에 베이지색 반팔티와 청반바지를 입은 언니가 헐레벌떡 뛰어 왔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도 같은 반 남자애한테 맞고 다니는 날 언니가 찾아온 것이었다.
"울지 말고 누가 그랬는지 이름 말해, 얼른."
헐떡이는 숨을 뒤로 하고 언니가 다급하게 물었다.
"박정민.. 박정민이 그랬어.. 같은 반 남자애.."
나를 괴롭힌 친구 이름을 말하자마자 번뜩거리는 언니의 눈이 보였다. 이제 곧 큰일이 날 것만 같은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드르륵 탁, 미닫이로 된 갈색 교실문이 매섭게 열렸다.
"박정민이 누구야? 너야? 너 이리 나와."
교실 밖에는 고개를 숙인 나와 내 손을 잡은 언니가 나란히 서있었다.
"네가 내 동생 괴롭혔어? 4학년이 돼서 친구 때리고 그러면 되냐? 그리고 너는 남자애고 지혜는 여자애잖아,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도와줘야지. 괴롭히면 돼? 안돼?"
숨을 고르고 강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하는 언니의 뒤에 언뜻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잘못했어요... 저는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건데... 울지 몰랐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잘못을 비는 아이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에서 안타까움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났다. 내 손을 잡은 언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더 다그치려던 언니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휴... 알았어,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혼난다. 지혜한테 사과해, 얼른 미안하다고 해."
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친구를 보며 괜히 멋쩍은 마음에 작은 일을 큰일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해.. 지혜야, 다신 안 그럴게.."
순간 정민이가 불쌍해 보였다.
"알았어.."
언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표정은 날 안쓰럽게 쳐다볼 때 엄마 얼굴을 닮아있었다.
"너도 이제 그만 울어, 정민이가 안 그런다고 약속했으니깐 이제 다신 안 그럴 거야. 알았지?"
그 이후로 정민이뿐만 아니라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날 괴롭히면 우리 언니가 찾아온다는 소문.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내가 새 학기를 시작하는 순간마다 언니가 친구들을 우르르 몰고 우리 반으로 찾아왔다. 언니와 내가 같은 초, 중, 고를 다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르륵 탁, 또다시 미닫이로 된 갈색 교실문이 열렸다.
"김지혜가 누구야? 쟤야? 안녕, 네가 지혜구나, 언니랑 하나도 안 닮았네."
"안녕, 지혜야, 나 너네 언니 친구야."
"안녕, 지혜야,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우리 반에 놀러 와도 돼."
언니 친구들의 살벌한 환영식에 웅성거리는 같은 반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 이름이 김지혜야? 이제 알았네, 하도 말이 없어서...'
'저 사람이 쟤 언니야? 둘이 하나도 안 닮았네, 무섭게 생겼다..'
내 동생을 건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언니는 그런 식으로 했다. 항상 뒤에 자신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식으로, 나는 또 언니에게 짐이 된 것만 같아 죄스러웠다.
서울에서 부천으로 내려온 뒤 나와 언니의 성격은 180도 변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병으로 각종 병마와 싸우면서 나는 모든 기력을 잃었고 언니는 그런 나를 위해 애를 썼다.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꺾일 때마다 언니가 와서 날 일으켰다. 팔로, 발로, 마음으로 내가 사회 속으로 친구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끔 그곳으로 어떻게든 날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어릴 적 내 뒤로 숨었던 언니가 이제는 내 앞에 있었다. 든든했다. 언니가 옆에 있는 것이, 언니는 나의 자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