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언니의 언니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던 날
마포구 공덕동의 작은 동네가 소란했다. 곧이어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은아, 지혜야, 방앗간 가서 쌀 두 되만 사와."
엄마의 심부름에 어린 나와 언니는 손을 잡고 대문을 나섰다. 언니와 둘이서만 하는 첫 외출이자 심부름이었기에 나는 평소와 다르게 들떠있었다.
"신난다. 언니, 우리 시장구경 하고 오자!!!" 나와는 달리 길눈이 밝은 언니 덕분에 우리는 곧 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방앗간은 시장 안쪽 구석 자리에 있었기에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나는 언니의 손에 들린 천 원짜리 지폐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쌀 사고 이백 원 넘게 남을 것 같은데 언니한테 뽑기 사 먹자고 해야겠다.' 머릿속에 오직 달고나 생각뿐이었던 나는 우리가 어느새 방앗간 앞에 도착한 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 옆에 있어야 할 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뭐야, 언니 어딨어??"
순간 언니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난 더 큰 소리로 언니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그리고 그 순간, 내 등에 붙어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언니였다. 어쩐 일인지 언니는 나무에 붙은 매미같이 내 등에 바짝 붙어있었다.
"뭐야, 왜 장난을 쳐, 없어진 줄 알고 놀랐잖아!!!"
빽 소리를 지르는 내 모습에 언니는 더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혜야, 방앗간 아저씨한테 쌀 두 되만 달라고 해..."
나는 언니의 장난에 이미 화가 난 상태였으므로 그 의견을 가볍게 무시했다.
"언니가 말해, 왜 나한테 시켜? 돈도 언니가 가지고 있잖아!."
언니는 순간 내 말에 하얗던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는 얘기 못하겠으니깐 네가 하라고...."
나는 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방앗간 아저씨한테 말을 못 하는 건지, 왜 날 시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끝까지 언니가 나를 놀리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얼어붙어있는 언니의 모습이 왠지 딱해 보여 언니의 손에서 천 원짜리 지폐를 매섭게 빼앗아 들었다.
"언니 바보야? 왜 이런 것도 말을 못 해? 내놔 그럼! 내가 말할게."
그때까지 언니는 내 뒤에 숨어 내 옷자락 끝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응.. 고마워, 지혜야.."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언니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때까지 한 번도 우리가 그런 류의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응?? 아.. 응응.. 잠깐만 있어, 언니, 내가 쌀 사가지고 나올게."
뭔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책임감이 날 더욱 씩씩한 발걸음으로 방앗간에 들어서게 했다.
나 : "안녕하세요, 아저씨, 쌀 두 되만 주세요."
방앗간 아저씨 : "오, 지혜 왔구나, 혼자 왔니? 쌀 두 되는 혼자 들기 무거울 텐데... 두 개로 나눠서 담아줄까?"
나 : "네!, 아저씨, 저 언니랑 같이 왔어요! 그럼, 두 개로 나눠서 담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방앗간 아저씨 : "아, 언니랑 같이 왔구나, 그런데 언니는 어딨어?"
나 : "언니는 파 사가지고 온다고 했어요. 금방 올 거예요."
방앗간 아저씨 : "그랬구나, 자 여기 있다."
어린 내가 들기에는 2kg 되는 쌀 한 되 가 무거워 보였는지 방앗간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속이 비치는 하늘색 비닐봉지에 쌀을 두 개로 나눠서 담아주셨다. 나는 쌀을 들고는 나가 방앗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언니를 찾았다. 저 멀리 시장 안 전봇대 옆에 서있는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괜히 땅을 신발로 쓸고 있는 언니의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양손에 들린 쌀 봉지를 올려 보여주었다.
"다 샀어. 이제 가자, 언니."
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손에 들려있던 쌀 두 봉지를 잽싸게 낚아챘다.
"내가 들게, 네가 들기엔 너무 무거워."
나는 언니 손에 있는 쌀 한 봉지를 다시 뺏으며 얘기했다.
"아저씨가 언니랑 나눠서 하나씩 들으라고 두 개로 나눠준 거야, 내놔."
언니는 아직도 붉은 끼 있는 얼굴을 하고 날 보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래도 무거우면 언니 줘. 언니가 들어줄게. 그리고 고마워. 대신 말해줘서."
나는 자꾸 고맙다고 말하는 언니가 낯설어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언니, 방앗간 아저씨한테 말하기가 쑥스러웠어?"
단도직입 전인 내 질문에 여전히 언니의 붉은 얼굴이 얘기했다.
"응... 난 그런 말은 잘 못하겠어.."
순간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쌀을 들지 않은 손을 언니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런 건 내가 할게, 언니는 그냥 내 뒤로 숨어."
그 순간 난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된 것만 같았다. 항상 날 위해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대신 혼나주던 언니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음에 행복했다. 언니는 알까? 내가 처음으로 언니의 언니가 되어주기로 마음먹었던 날을, 어린 시절의 나는 언니를 언니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 나와 놀아주지 않는 언니가 미웠지만 항상 함께하고 싶었고 나를 귀찮아하는 언니가 야속했지만 동경했다. 항상 내 뒤로 숨던 언니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반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엄마보다 언니를 더 대견해했다. 나는 언제나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나에게 없는 대단한 무언가가 언니에게 있다고 늘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 언니와 내손에는 쌀 한 봉지와 달고나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유독 그날 우산 모양의 달고나는 더 달고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