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 Jan 12. 2017

별안간 진짜 어머님이 되어버리다.

지금, 여기에 머물기

난 관계를 참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어릴 때는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알고 모두와 잘 지내고 사람들과 얼마나 웃는가에 관련된 관계, 지금은 양..에 상관없이 느낌이 통하고 깊이가 있거나 대화가 되는 사람 혹은 자연과의 관계가 참 중요하다.

내가 왜 집 안에 머무는 것보다 밖에서 힘을 얻는지를 돌이켜보니 그 관계 같다. 또,꼭 누굴 만나지

않더라도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충족되는 것들이 있다.


춘이는 너무 귀엽다. 그 오물거리는 입과 까만 별빛 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어깨가 굳는지도 모르고 쳐다보고 있다.

춘이와의 관계는 더할 나위없이 신비롭고 새로운 영감을 주지만, 가끔 춘이와 나를 너무 동일시해버려서 엄청난 책임감과 잘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나를 짓누르는게 문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초보맘이라 그런지 내가 그리 생겨먹어서 그런지 좀 더 두고볼일이다.

그래서 더 바깥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나만을 위한 행위를 필수적으로 해야함을 잘 알고 있다.


오늘은 괜히 짜증이 나고 눈물이 났다.

이런 부분에서 불충분한 것들이 오늘은 갑자기 훅 부풀려진듯 했다.

컨디션 난조일 때 내가 남편에게 의지를 하고 내 상태를 알아주기 바라는 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그 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명상 앱을 켜고 10분간 내 상태를 지켜보았다. 호르몬님때문에 눈물이 마구 나서 잘 지켜봐지지가 않았지만 그 또한 지금 내가 호르몬 때문에 이리 질질 거리고 있구나 하며 그냥 내버려두었다. 호흡에 집중하며 춘이가 칭얼대는 소리, 아빠가 춘이 트림시키는 소리, 내 콧등으로 콧물이 흐르는 느낌, 콧물이 너무 많이 나는 것도 산후 증상인건가 하는 내 생각들이 흘러가도록 가만 내비두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10분간 현재에 집중하는 짧은 명상시간은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콧물은 고장난 듯이 계속 흘렀지만,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눈을 뜨고는 오랜만에 컬러를 칠하며 내 마음을 좀 더 봐야겠다 생각했다.

하 너무 좋다. 컬러테라피 도구를 꺼내 지금 눈에 들어오는 색을 고르고 도톰한 종이에 내 마음가는대로 색을 칠해나갔다. 크레용의 냄새, 물을 묻혀 붓질을 하니 번져나가는 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 색을 칠하면서 자유로워지는 나의 머릿속, 함께 하는 음악....좀 전까지만해도 고구마 열개먹고 체한 것같던게 확 뚫리는 느낌이다.

다 칠하고 보니, 옐로우 컬러가 확 들어왔다. 쨍쨍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온 몸으로 받고 싶어서 선택했고, 칠하다 보니 정말 크레용이 닳도록 칠해버렸는데 쏟아붓고 나니 얼마나 시원하던지..


컬러테라피 과정 수업을 들을때는 15분정도면 끝나는 색칠이 이번에는 한시간 반이나 걸렸다.

남편에게 맡긴 춘이가 엄마가 딴짓하는지 알았는지 이 시간에 똥을 싸서 호출. 기껏 먹인 젖을 토해서 다시 먹이느라 호출. 낑낑대는 소리에 다시 트림시키는라 호출. 그래도 너무 기특한 것이 결코 새벽 1시 이후까지 안 자는 일은 아직 없어서 팔 떨어져라 안아주고 등 두들겨주니 곧 잠들었다.

이렇게 해서 어렵사리 한장의 색칠을 완성.

옐로우가 눈에 띄어 카드도 꺼내보니 역시 컬러는 나를 꿰뚫고 있었다. 흐미.

출산하고 나서 의외로 내가 제일 위안을 얻었던 건 컬러테라피를 함께 배웠던 동기들과의 대화였다. 우리의 단톡방엔 갖가지 풍경 속 컬러 사진, 컬러로 얘기하는- 이를테면 골드빛으로 충만한 한 해 되세요 라던가-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뭔 말인가 하겠지만, 컬러테라피스트를 준비하는 이 사람들과는 컬러로 얘기하는게 매우 자연스럽다.

이미 새벽 두시가 다 된 시간이지만 출산 후 첫 색칠을 이들과 공유해야겠다.


내일은 우리 춘이 첫 예방접종 날이다. BCG와 B형 간염 두 방의 주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맘 단디 먹고 춘이가 많이 안아파하기를 바래야겠다.


좀이따 밥 달라고 일어날 춘이를 위해 얼른 잠깐 눈을 붙여야겠다. 마음은 밤새 색칠하고 싶지만 오늘 이 시간이 어디냐. 자자.


**추가

이 글을 쓰고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춘이는 그새 얼마나 용을 썼던지 원래 자리에서 90도나 벗어나 있었다......하하핫


같이 공부하던 동기가 내가 색칠한 그림을 보고 보내준 캡쳐파일.

다뤄질만한 이슈에 양육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나와있다. 흐미 놀라운 컬러의 세계..








작가의 이전글 별안간 진짜 어머님이 되어버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