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 10월 남도여행
가을 산책에 나섰다가 뜻밖의 향기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아, 이게 무슨 향이지?’ 주위를 둘러보면, 그곳에 늘 이 나무가 있다. 바로 목서나무다. 봄의 향기가 라일락이라면 가을의 향기는 단연 목서꽃이다. 사철 푸른 나무에 아주 작게 피는 꽃이라서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일단 목서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다. 사방 50m 근방까지 퍼지는 향기 때문이다. 코끝을 찌르게 강렬한 향은 아니지만 달콤하면서 은은한 꽃 향이 퍽 매혹적이다. 가을 목서꽃이 필 무렵이면 생각나는 그 곳, 나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예부터 향 좋기로 소문난 목서나무는 정원수로 무한한 애정을 받았다. 그래선지 시골 마을 고샅길부터 대도시 아파트 단지까지 목서나무가 많다. 내 눈에 콩깍지라고 남도에 뿌리 내린 수많은 목서나무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나주 향교길에 있다.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목사골 나주는 도시 자체가 문화재급이다. 그만큼 발길 닿는 곳마다 볼거리며 즐길 거리 투성이다. 조선시대 궁궐 역할을 했던 금성관부터 나주읍성과 목사내아, 그리고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나주 향교까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가을 여행자를 유혹하는 목서꽃은 금성관에서 나주향교 쪽으로 한참을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하천 길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목서꽃 향기가 벌써 길마중을 나왔다. 점점 진해지는 향기를 쫓아 도착한 곳에 정겨운 한옥 대문이 여행자를 반긴다. 나주향교와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집, <3917마중>이다. 푸른 숲 속에 안긴 너른 마당에 전통 한옥과 서양식 건물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집이다. 목서꽃은 그 집 마당에 피어있다.
목서나무는 꽃의 색과 향에 따라서 금목서와 은목서로 나뉘는데 <3917마중> 마당에는 두 종류의 목서나무가 모두 있다. 마당에 자리한 옛 우물가 옆으로 금목서가 두 그루, 건물 옆으로 은목서 한 그루가 가을마다 우아한 향기를 내뿜는다.
<3917마중>이라는 이름에 집의 역사가 담겨있다. 1939년에 지어진 옛 집을 2017년에 다시 재건한 곳이다. 나주 의병장이었던 ‘난파 정석진’의 손자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집으로 옛 이름은 ‘난파고택’이다. 당시 유일한 건축가였던 박영만 선생이 설계한 집으로 더 유명한데,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식 건축기법까지 모두 동원된 집이다. 건물은 목재와 벽돌을 함께 사용했고 창문만 해도 삼각형, 사각형, 육각형까지 모두 모양이 다를 정도로 근대건축의 독특한 매력이 눈길을 끈다. 광복 이후 몇 번의 주인이 바뀌며 한동안 방치됐던 곳이 2017년에 새 주인을 만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옛 안방과 사랑채를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곡물창고를 개조한 카페, 목서나무 아래 펼쳐진 야외 공연장 등 다양한 문화체험공간이 마련돼 있다. 최근 TV드라마 <알고 있지만>의 촬영지로 인기를 끌면서 나주의 대표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가을 나주에 목서꽃만 피는 게 아니다. <3917마중>과 이웃한 <나주향교>는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향교답게 정원의 나무들도 역사가 길다. 특히 가을이면 향교에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어 마치 봄의 꽃동산처럼 화사한 풍경을 자아낸다.
나주향교의 은행나무가 여럿이 함께 어울려 있다면 금성관의 은행나무는 일당백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5백 년 가까이 금성관을 지켜 온 대장군답게 늠름하고 멋지게 물이 든다. 누구나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허락된 금성관 벽오헌 툇마루에 앉아서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을 보고 있노라면 임금님도 부럽지 않다.
금성관 옆으로 옛 관리들이 숙소로 사용한 <목사내아>가 있는데 이곳은 숙박체험이 가능한 전통문화 체험 공간이다. 원한다면 누구나 <목사내아>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다. 나주 목사 중에 가장 존경받았던 목사들의 이름을 따서 방을 정했는데 승진방, 합격방, 득녀·득남방이라는 별칭이 따로 있다. 혹시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목사내아>에서 하룻밤이 어떨까.
나주는 바다와 평야를 두루 품고 있는 남도 땅답게 풍부한 식단과 개성적인 맛이 가득하다. 나주를 대표하는 3대 요리를 꼽자면 읍내 우시장과 함께 발전한 나주곰탕, 톡 쏘는 맛에 영양까지 풍부한 영산포 홍어, 영산강과 서해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맛볼 수 있는 구진포 장어구이가 있다. 뭐 하나 빠질 데 없는 나주의 진미지만 그 중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울푸드는 답답한 속까지 뻥 뚫어주는 영산포 홍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홍어는 회로만 먹는 음식이 아니다. 맛난 음식 재료가 그렇듯이 홍어 역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보리 순을 넣고 끓인 홍어 앳국, 톡 쏘는 맛이 더 강렬해지는 홍어찜과 홍어전, 발효의 하모니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홍어삼합까지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슴 답답할 때, 푹 삭힌 홍어 한 점에 달큰한 막걸리 한 사발만큼 좋은 약이 없다. 덕분에 중독되는 맛이지만 이런 중독은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니 괜찮다.
나주 맛 삼총사만큼이나 유명한 음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불고기다. 춘장과 나주 특산품인 배를 갈아 넣은 양념에 푹 재운 돼지고기(삼겹살·목살)를 연탄불에 일일이 구워서 손님상에 내놓는다. 입맛을 당기는 감칠맛에 불향까지 은은하게 배인 나주불고기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러니 살찔 걱정도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