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에 핫초콜릿 마시자는 남자

데이팅앱에 지쳐갈 때쯤 나타난 사람

by 엄지현

한국과 영국은 첫 만남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 소개팅을 나가면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게 정석이었다. 반면 영국에선 첫 데이트 때 보통 밥을 먹지 않는다. 가볍게 맥주 한 잔 하는 게 영국 첫 데이트의 정석이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으로서 음식도 없이 술만 마시는 게 이상하기도 했지만, 영국인들은 평소에도 밥 없이 술을 잘 마신다. 영국인들이 워낙 술을 즐겨마시기도 하고, 외식비가 비싸서 술만 마시는 것도 있다. 그리고 술 데이트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가볍게 빠져나오기에도 용이하다.


문제는 내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 와인 한 잔, 맥주 한 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알쓰’로써, 영국의 술 데이트 문화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대부분의 상대가 첫 데이트로 펍이나 바를 잡았는데, 술이 썩 당기진 않았지만 처음부터 까탈스러워 보이고 싶진 않아서 굳이 다른 옵션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음주 횟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엄청 취할 만큼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한 잔만으로도 내 간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첫 데이트로 핫초콜릿을 마시자며 초콜릿 전문점을 두세 군데 보내줬다. 간혹 술 대신 커피를 마시자고 한 경우는 있었지만 핫초콜릿은 처음이었다. 풉, 귀엽네. 괜히 혼자 웃음이 났다. 나야 뭐, 달달한 걸 좋아하기도 하고 술을 안 마셔도 되니 좋았다. 그렇게 핫초콜릿 전문점에서 이 남자를 처음 만났다.


사실 첫 데이트 때부터 이 사람인 줄 알았다거나,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첫 만남부터 잘 빠지는 스타일도 아니고, 데이팅앱에서 만난 사람들은 초반에 조금 더 경계를 세우고 보기도 했다. 그의 첫인상은 그저 ‘생각보다 실물이 귀엽네’,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다’ 정도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도 사실 쉽지 않다. 앱에서 만난 사람 중 못 알아볼 정도로 사진과 실물이 달랐던 사람도 좀 있었고,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아 자리에 앉은 지 5분 만에 집에 가고 싶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이 정도면 괜찮은 첫 데이트였다고 생각했고,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데이트가 끝나고 ‘이 사람도 내가 마음에 들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함께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섣불리 그의 속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경험상 데이트 분위기가 좋아도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고 재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데이팅앱의 특성상, 다른 옵션을 열어둔 채로 시간만 끄는 경우가 정말 흔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언제 시간 돼요?”라며 그 자리에서 바로 두 번째 데이트를 신청했다. 다음 데이트에서도 그 자리에서 바로 세 번째 데이트를 잡았고, 그렇게 수월하게 데이트가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에 나는 데이팅앱에 많이 지쳐있었다. 1년 가까이 앱을 떠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봤는데 단 한 명과도 진지한 관계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연애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공부든, 일이든, 운동이든 노력을 하면 결과가 어느 정도 따라오기 마련인데, 연애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더 노력한다고 더 잘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힘을 주면 줄수록 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실망에 그냥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만나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기대가 적으면 실망도 아낄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마침 이쯤에 데이트가 쉬워 보이게 만든 남자가 나타난 거다. 앱에서 흔히 보던 애매모호함 없이, 좋으면 좋다고, 보고 싶으면 또 보자고 하는 남자. 데이팅앱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자동으로 경계를 세우게 됐는데, 이 사람은 만날수록 내 가드를 내리게 만들었다. 다시 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대로 쭉 순탄하게 연애가 흘러갈 줄 알았다. 그때는 몰랐다. 앞으로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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