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냐와 함께 깊어진 마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

by 엄지현

언제부터 이 남자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는지 돌이켜보면, 그의 집에 처음으로 초대받은 날이었다. 그전까지는 호감을 가지고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이날을 기점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데이트로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나서 그는 나에게 물었다. “내가 잘하는 음식이 세 가지 있는데, 스테이크, 로스트 치킨, 라자냐 중에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일단 여기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나에게 선택지를 준다는 것, 그리고 제시한 세 메뉴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는 것. “그럼 나는 라자냐 먹을게!”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라자냐를 골랐다. 나에게 라자냐는 레스토랑에서나 먹는 음식이지 집에서 해 먹는 음식이 아닌데, 이 남자가 만드는 라자냐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설레는 기분으로 와인 한 병과 초콜릿을 사들고 그의 집에 도착했다 (첫 데이트로 핫초콜릿을 마시자고 한 이 남자는 사실 초코홀릭이다). 그는 이제 막 라자냐를 오븐에서 꺼냈다며 나를 반겨주었다.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집 구경을 간단하게 시켜주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니. 이 소품은 예전에 어디 여행 갔을 때 산 거고, 거실에 크게 걸려 있는 종이공예 작품은 코로나 때 시간이 많아서 직접 만든 거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홀아비 느낌 물씬 나던 전남친들의 집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확연히 비교됐다.


집 구경을 하고 식탁에 앉았다. 정갈하게 테이블 매트를 깔아 놓고 그 위에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한 식탁. 그는 따끈따끈한 라자냐 한 조각을 내 접시에 올리고는, 접시 주변에 묻은 소스를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마치 파인다이닝 셰프가 손님에게 나갈 음식을 정돈하듯, 이렇게 플레이팅까지 신경 쓰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나에게 음식을 보기 좋게 주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라자냐를 한 입 먹는 순간 그 감동이 더 또렷해졌다. 토마토 소스부터 치즈 소스까지 모두 직접 만들었다는, 고급 식당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라자냐였다.


물론 라자냐 때문에 그가 좋아졌다는 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은 살면서 얼마든지 먹어봤다. 내가 감동받은 건, 나를 잘 대접해 주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화려한 말보다 섬세한 행동으로 진심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 내 마음도 점점 열려갔다. 그날 이후에도 그는 말 대신 행동으로 마음을 보여주었다. 내가 요리를 하는 날이면, 함께 먹을 디저트를 꼭 챙겨 왔다. 직접 구운 초콜릿 쿠키와 브라우니, 회사 근처에서 사 온 내 최애 티라미수. 내가 젤라토를 좋아하는 걸 알고는 아이스크림 기계를 사서 직접 젤라토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는 우리 집 강아지와도 금방 친해졌다. 당시 강아지를 입양한 지 얼마 안 돼서 이 남자를 만나기 시작했는데, 어린 강아지를 혼자 두고 집을 오래 비우기가 어려워서 주로 우리 동네에서 데이트를 했다. 그는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항상 우리 집으로 와주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한 번도 키워보지 않았다는 사람답지 않게, 우리 강아지와 엄청 잘 놀아주었다. 함께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강아지와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는 게 우리 데이트의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나와 강아지 둘 뿐이던 일상에 그가 점점 스며들수록, 이런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음에도, 아직 ‘사귄다’라는 레이블은 없는 사이였다. 서서히 ‘그럼 우리는 지금 어떤 사이인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마음과 관계의 정의가 항상 같은 속도로 가는 건 아니라는 걸, 그때의 나는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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