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라는 수식어 앞에서
한국에서 소개팅을 할 때는 ‘삼프터’라는 공식이 있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면 세 번째 만남에 고백을 해서 정식 관계로 넘어간다는 공식. 다소 빠르긴 하지만, 그때는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세 번 정도 만나보면 이 사람이 계속 만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영국의 관계 정의 방식은 아주 느리고 복잡하다 (데이팅앱이 보편화된 서양 국가들은 이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첫 번째로, 데이트를 몇 번 한 사이는 ‘서로 만나는 사이 (Seeing each other)’다. 만남이 이어지고 연락도 꾸준히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정의되지 않은 상태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을 동시에 만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아직 사귀는 관계는 아니기 때문에 바람 폈다며 화낼 순 없는 사이.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두 번째로는 ‘서로만 만나는 (Exclusive)’ 단계가 있다.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은 안 만나기로 합의를 했지만, 아직 연인 관계는 아닌 상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단계를 거치고 정식적으로 고백을 하고 나면 ‘공식적 연인 관계 (Official relationship)’가 된다.
왜 이렇게 복잡하냐고? 나도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내 경험과 주변 사례를 분석해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영국에서는 공식 연인 관계를 한국에서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막상 사귀기로 한 뒤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해서 한두 달 만에 헤어지는 커플을 종종 봤는데, 영국에서는 먼저 서로를 충분히 알아본 뒤 사귀기 때문에 한번 연인이 되면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 ‘사귄다’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무겁게 느껴서 그 단계로 가기까지 더 긴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데이팅앱으로 인해 만남이 너무 쉬워졌다는 것이다. 쉽게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혹시나 그중에 더 나은 옵션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 선택지를 열어두고 공식적인 관계로 ‘발목 잡히는 것’을 최대한 미뤄두는 거다.
우리의 경우 첫 번째에서 두 번째 단계까지 가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 데이트를 한 뒤, 내가 먼저 이 남자에게 다른 사람도 만나고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만 알아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며, 나만 만나고 있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 공식적 연인 관계로 가는 과정에서 타이밍의 차이가 생겨났다.
30대에 시작한 만남인만큼, 나도 예전보단 훨씬 신중했다. ‘삼프터’로 사귈지 말지를 결정하기엔 그 리스크가 너무 커진 나이였다. 이 연애가 마지막 연애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사람을 진중하게 알아보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지금 당장 만남이 재미있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 미래를 함께 그려나갈 수 있는 사람인지. 중요한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맞는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잘 맞는지.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시작할 순 없지만, 최대한 신중하게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나는 만난 지 두 달쯤 되는 시기에 그를 연인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었다.
문제는 그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여자들 중에는 남자가 고백을 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는 답답해서 이런 걸 마음에 담아둘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준비가 되자마자 바로 물어봤다. “나는 이런 상태인데, 너는 어때?” 그러자 그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문화 차이와 신중함의 정도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유난히 조심스러운 사람이어서, 이번에도 그런 거라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약 없이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한 달의 시간을 더 갖자고 했고, 그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더 만남을 이어갔고, 그동안 이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중간에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한 달을 더 준만큼 일단 기다렸다. 그와 함께 하는 데이트는 늘 즐거웠고, 아무 갈등이나 문제도 없었기에 당연히 이대로 사귀는 사이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세 달째가 되었는데 그가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거다. 이해가 안 됐다. 이렇게 잘 만나고 있는데 왜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거지? 그냥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건가? 나에게 세 달은 스스로 정한 마지노선이었고, 이건 내가 시간을 더 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마음 아팠지만,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그와의 만남을 정리했다.
그는 그제야 자기 감정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 대화를 하고 돌아설 때, 슬픈 감정이 생각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걸 보고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데이팅앱으로 누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계속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는데, 그 순간 마음의 깊이를 확인하게 되었단다. 그렇게 한 번 폭풍을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이 남자는, 다음날 커다란 수국 화분을 들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00번 정도 사과를 했다. 자기 감정에 서툴러 이 사달을 내서 미안하다고.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세 달 만에 헤어질 위기를 맞고서야 고백한 이 남자. 완벽한 타이밍도, 이상적인 고백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이미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하루동안, 나 역시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제외하면, 그는 늘 다정했고 나를 존중해 주는 남자였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공식 연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