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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Jun 29. 2022

이상 - 언어와 숫자를 재료로 시를 건축한 시각예술가

언어와 삶 - 본질에 가까이 가려면 액면가로 보고 읽자

이상의 오감도는 출판 당시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폭발적인 욕설과 항의로 조선일보 연재  여부를 왈가왈부했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조선일보 편집 책임을 맡았던 이태준은 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며 비장한 심정으로 이상의 시 게재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 역시 그가 쓴 2000여 개의 시 중 극소수인 30개를 엄선해서 연재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당시 대중의 빗발치는 반발로 무산되었다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했다.


지금도 시를 분석하고 뭔가 심오한 뜻이나 상징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습관인 독자라면 이 시를 접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래 작품을 문장, 단어, 숫자로 구성된 시각 예술품으로 감상해 보면 어떨까?

이 시는 아무 선입견이나 사전 지식 없이, 보이는 그대로 읽고 감상하면 오히려 너무나도 이해하기가 쉬운 시다. 시가 주는 메시지나 느낌도 굉장히 단순하고 직접적이다.


13이란 불길한 숫자가 예수와 12제자, 혹은 일제 강점기 한국의 13도를 의미한다는 등 시와 실제로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사실을 연관 지을 필요도 없다. 억지로 시어 하나하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파고들자 않아도 좋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 공포에 사로 잡힌 아이들의 방향성도, 이유도 없는 무조건적인 질주이다.

무서운 사람이 무서워하는 사람도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시는 출구 없는 현실에 던져진 아이들 같은 동시대인의 절박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이 숨 막힘을 길이와 구조가 같은 행을 무려 10번도 넘게 반복하며 시각적으로도 명확히 나타난다.


그러다가 문단이 바뀌며 빈 줄이 나타난 후에 나타나는 두 행에서 “길은 뚫린 골목”이라는 말, “13인의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라는 말 한마디에 시 속 막다른 골목을 피해 도망다니던 아이들 모두와 출구가 막힌 삶에서 질주하다가 숨이 찬 동시대인들, 그리고 시의 내용과 시각적 형식에 갑갑해하던 독자 모두가 안도하게 되고, 숨통이 트이게 된다.


이 시는 1-13까지 숫자만 나열하고 몇 안 되는 같은 단어로 지은 같은 구조의 문장과 이와 다른 마지막 한 줄 을 배치하는 등 언어를 재료 삼아  종이 위에 건축한 시각 예술품이다.


이상은 그냥 단어를 이용해 탑을 쌓은 것이다. 독특한 방식의 시 쓰기를 통해 시각 예술과 숫자, 언어 예술의 통합을 실험했다.


실제로 이상은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일찌감치 그 꿈을 접고 생계에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주변의 권유로 건축을 전공했다. 오히려 이런 그에게 어쩌면 이런 방식의 창작은 너무 당연한 시도였고 그를 그답게 표현한 행위예술이었다.


그거 이런 실험적인 작품들을 문예전문지가 아니라 “조선과 건축”이라는 건축, 설계 전문지에 실으며 등단했다는 사실, 오감도 제1호도 동 잡지에 게재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원작은 일어로, 위에서 아래로 쓰는 형식으로 게재되었다.


이 시가 발표된 시기보다 앞서 1912년, 사회주의 혁명 발발 5년 전 이웃 나라 러시아에서는 마야꼽스끼, 흘레브니꼬프 등 모스크바 출신 시인 몇 명이 모여 “대중의 취향에 따귀”라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고, 동 제목의 시선집을 출판했다. 이는 미래주의의 시작이자 러시아 아방가르드 문학의 예고였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와 야심에 찬 이들은 시의 음성적-형식적 측면에 주목하고, 각종 전통을 파괴했으며, 언어를 사용한 건축물 짓는 듯한 마음으로 시를 썼다. 이상의 예술세계와 결이 비슷하다.


이상은 당시에 어떻게 세계 문학과 예술을 접하고 받아들였을까.


그는 생계를 위해 건축사무실, 회계사무소 등에서 일하다 마지막 친구인 한 화가의 소개로 글을 실으며 작가가 되었다. 만 26세로 요절하기 전까지 글을 썼으니 작가가 그의 마지막 직업인 샘이다. 그의 시에는 작가가 되기 전의 그의 삶-건축 도면과 숫자-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1930년대 우리 문학은 과소평가되었다. 당시 활동한 한국 작가들은 식민정책, 생계 등 외적 어려움에도 결코 기죽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많은 작가들이 해방 전에 요절했는데,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먹고사는 문제에 치이면서도 전통과 당시 세계 예술 사조의 기법 사이에서 창조적 실험을 하며 끊임없이 글을 쓰고, 동시대인의 삶과 사회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으며, 늘 당당했다.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예술계 밖에서 이어 온  생업은 창작 활동의 자양분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돈을 벌기 위한 도박자), 체호프(의사), 나보꼬프(동물학 박물관 직원), 트란스트뢰메르(상담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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